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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은 왜 전주로 돌아가지 못했나— 황산으로 꺾인 후백제 최후의 퇴로

일리천 전투에서 크게 패한 신검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후백제의 수도이자 자신의 근거지였던 전주로 돌아가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주성에 들어가 남은 병력을 수습하고, 성을 지키며 고려군에 맞서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신검이 전주가 아니라 황산 쪽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이 대목은 단순한 퇴각로의 문제가 아니라, 후백제 내부에 이미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신검이 전주로 가지 못한 배경에는 박영규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고, 순천 지역 호족 세력과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다. 그는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고려에 협력하겠다는 뜻을 보였고, 훗날 왕건에게 약속받은 대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박영규가 단순히 말로만 귀순 의사를 밝힌 ..

중세/후삼국 2026.07.13

견훤 앞에서 흔들리는 후백제군— 일리천 전투

936년 가을 9월, 왕건은 마침내 결전을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 그는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병력을 합친 뒤, 곧바로 일선군으로 향하였다. 이에 맞서 신검도 병력을 이끌고 나와 고려군을 막았다. 양군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후삼국의 마지막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왕건은 천안부에서 곧장 남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향을 틀어 일선군 쪽으로 향했다. 이 움직임은 후백제군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주었다. 신검도 첩자를 통해 왕건이 일선군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한 신검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일리천 쪽으로 진군하였다.일선군은 오늘날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에 해당한다. 기록에는 왕건의 군대가 송선에 이르렀다고도 되어 있고, 일리천의 위치를 현재의 여차니..

중세/후삼국 2026.07.13

왕건의 마지막 포석 — 천안부는 왜 후삼국 결전의 출발점이 되었나

신검의 정변 이후 후백제 내부의 균열은 빠르게 깊어졌다. 이때 주목할 인물이 순천 지역의 호족 박영규였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고, 동시에 신검에게는 매형이 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신검과 견훤 중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순천 지역은 견훤이 거병한 이래 오랫동안 그의 핵심 기반이었고, 박영규 역시 줄곧 견훤을 지지해 온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신검 정권을 따르기보다 고려에 뜻을 전하는 길을 선택하였다.936년 2월, 박영규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귀순 의사를 밝혔다. 그는 단순히 항복하겠다는 뜻만 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병력을 맡기면 고려를 위해 후백제군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왕건에게 이 소식은 매우 중요했다. 후백제를 공격할 ..

카테고리 없음 2026.07.13

신검의 정변과 견훤의 고려 귀부

935년 3월, 후백제 왕궁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찬(伊飡) 능환(能奐)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에 있는 양검·용검에게 연락하여 음모를 꾸몄다. 파진찬 신덕·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고하여 견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은 이내 대왕이라 자칭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후백제라는 나라를 일으킨 견훤이 자신의 맏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절에 유폐된 것이다.정변의 직접적 도화선은 견훤의 후계자 결정 문제였다.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견훤은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금강이라는 이름은 불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금강야차명왕에서 비롯된 '가장 뛰어난 왕자'를 뜻하는..

중세/후삼국 2026.07.13

경순왕의 항복과 신라 멸망의 내막

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군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단 하나였다. 나라를 왕건에게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 신라는 이미 스스로를 지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927년 견훤이 경주를 유린하고 경애왕을 살해한 이래, 신라는 이름만 남은 빈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경순왕 자신도 견훤의 손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견훤마저 이제 고려에 귀부한 처지가 되었으니, 신라의 형세는 더 이상 버틸 명분도, 버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경순왕이 항복을 결심한 데는 현실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싸우다가는 백성들만 희생될 뿐이라는 인식이 그의 결단을 이끌었다.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대다수는 항복에 동의하..

중세/후삼국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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