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신검은 왜 전주로 돌아가지 못했나— 황산으로 꺾인 후백제 최후의 퇴로

크리티컬! 2026. 7. 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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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에서 크게 패한 신검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후백제의 수도이자 자신의 근거지였던 전주로 돌아가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주성에 들어가 남은 병력을 수습하고, 성을 지키며 고려군에 맞서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신검이 전주가 아니라 황산 쪽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이 대목은 단순한 퇴각로의 문제가 아니라, 후백제 내부에 이미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신검이 전주로 가지 못한 배경에는 박영규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고, 순천 지역 호족 세력과 깊이 연결된 인물이었다. 그는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고려에 협력하겠다는 뜻을 보였고, 훗날 왕건에게 약속받은 대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박영규가 단순히 말로만 귀순 의사를 밝힌 것이 아니라, 실제 전쟁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박영규가 전주성을 직접 비웠다거나, 신검의 귀환을 막았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검이 패전 뒤 전주로 곧장 돌아가지 못했다는 점은 중요한 단서다. 후백제 내부에는 여전히 견훤을 따르는 세력과 신검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리천 패배는 이미 불안하던 신검의 권위를 무너뜨렸고, 전주마저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백제의 수도는 더 이상 신검에게 든든한 성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검은 왜 황산으로 향했을까. 그 이유는 후백제군의 후방 본영이 황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군이 천안에서 출발해 일리천까지 진군했다면, 후백제군 역시 황산을 거점으로 삼아 일리천 전장으로 나아갔을 수 있다. 이 경우 신검의 퇴각은 무작정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후방 거점으로 물러난 행동이 된다. 하지만 고려군의 추격은 빠르고 집요했다. 후백제군은 황산에서 다시 압박을 받았고, 이후 탄령을 넘어 마성까지 밀려나게 된다.

황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의외로 짧다. 『삼국사기』에는 황산으로 갔다는 내용이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 등에는 후백제군이 황산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고려군이 추격하여 황산군에 이르고,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했다는 기록은 전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 짧은 문장 안에 신검의 패주, 고려군의 추격, 후백제 방어선의 붕괴가 모두 담겨 있다.

황산군은 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볼 수 있다. 이곳은 백제 말기 황산벌 전투의 현장으로 유명하며, 훗날 고려가 후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 개태사를 세운 장소이기도 하다. 황산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백제의 마지막 기억과 후백제의 마지막 퇴각이 겹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과거 백제가 신라와 맞섰던 들판에서, 이번에는 후백제가 고려의 추격을 받게 된 것이다.

황산 전투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명은 황산군, 탄령, 마성 세 곳이다. 문제는 이 지명들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이다. 특히 탄령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충남과 충북의 경계 부근, 대전 동쪽의 식장산, 완주 삼거리 탄현, 금산 진산면 교촌리 탄치 등이 후보로 거론된다. 어느 곳을 탄령으로 보느냐에 따라 후백제군의 퇴각로와 고려군의 추격로가 달라진다.

황산군과 탄령이 기록상 함께 붙어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탄령은 황산군 내부이거나, 적어도 황산군과 가까운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보다는 후백제군이 황산에서 밀려난 뒤 실제로 넘어갈 수 있었던 고개가 더 설득력 있다. 그런 점에서 완주 삼거리 탄현이나 금산 교촌리 탄치가 중요한 후보로 검토된다.

금산 교촌리 탄치는 기존 연구에서 탄현으로 지목된 곳이다. 현재 지도에서는 숯고개로 표시되는 군북 삼거리 주변과 관련되며, 금산에서 논산 연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에는 다소 좁고 험한 길로 보인다.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탄현’이라는 말이 단순한 큰길이 아니라, 병력이 지나가야 하는 좁고 중요한 고개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다. 전쟁에서 길은 넓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좁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장소가 된다.

또 하나의 후보는 금산 백령산성 부근이다. 백령산성은 금산군 남이면 일대에 있는 백제계 산성으로, 금산에서 영동·옥천 방면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다. 성 안팎에서는 백제 유구와 기와 등이 발견되었고, 지형 역시 방어에 적합하다. 하지만 백령산성에서 나온 명문와를 보면 이곳의 옛 이름이 ‘율현’, 곧 ‘밤고개’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중요한 군사 거점이기는 하지만, 탄현과 바로 연결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완주 삼거리 탄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탄현이 고산현 동쪽에 있었고, 진산현과도 일정한 거리 관계를 가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이 일대는 숯고개로 불리며, 길이 좁아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퇴각하는 후백제군과 이를 추격하는 고려군이 통과해야 했다면, 바로 이런 고개가 전장의 흐름을 좌우했을 것이다. 신검의 패주는 평야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고개와 산성, 좁은 길목을 따라 이어졌다.

마성의 위치도 논란이 있다. 완주 삼거리 탄현에서 서쪽으로 약 4.1km 떨어진 곳에는 용계산성이 있다. 용계산성은 탄현과 연산 사이에 위치하며, 길목을 장악하기 좋은 곳이다. 성의 둘레는 약 493m이고, 동쪽을 방어하는 구조를 갖추었다고 한다. 후백제군이 이 성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용계산성’이라는 이름과 ‘마성’이라는 지명이 직접 연결되지 않고, 대군이 주둔하기에는 규모가 작다는 점에서 신중하게 보아야 한다.

마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논산 부적면의 마구평리, 외성리산성, 개태사 부근 등이 후보이다. 특히 논산 일대에는 황산성과 외성리산성, 개태사, 왕건 관련 전승이 함께 남아 있어 황산 전투의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개태사는 후백제를 제압한 뒤 세워진 절로 이해되며, 후백제 항복 지점 또는 고려군 본영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전투의 흔적은 칼과 창보다 지명 속에 더 오래 남아 있는 셈이다.

마성을 익산 방면에서 찾으려는 해석도 있다. 고려군의 동선을 논산 황산에서 완주 탄령을 넘어 전주로 이어지는 길로 본다면, 마성은 완주와 전주 사이의 중간 지점이어야 한다. 이때 익산 왕궁면 일대의 왕궁평성이 후보로 떠오른다. 왕궁평성은 백제 왕성으로 사용되었던 평지성이며, 군대가 주둔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공간이었다. 왕건이 이곳에 주요 병력을 배치하고 후백제군과 대치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황산 전투의 핵심은 단순히 “신검이 또 패했다”는 데 있지 않다. 신검은 전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황산으로 밀렸으며, 다시 탄령을 넘어 마성까지 쫓겨갔다. 이는 후백제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뜻이다. 일리천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잃었다면, 황산에서는 돌아갈 길마저 잃은 것이다. 왕건은 전투에서 이긴 뒤 멈추지 않고 추격을 이어갔고, 후백제는 성 하나, 고개 하나, 길목 하나를 잃을 때마다 마지막 숨통이 조여들었다.

수도 전주를 눈앞에 두고도 돌아가지 못하는 신검, 옛 주군 견훤을 잃고 흔들리는 후백제 내부, 그리고 황산에서 마성까지 이어지는 긴 추격전. 이러한 정황은 후백제의 멸망이 한순간의 패배가 아니라, 길과 고개와 성을 따라 천천히 조여 온 압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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