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산에 머문 왕건은 더 이상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고려군의 주력은 이미 후백제군을 몰아 탄령을 넘어 마성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신검은 더 이상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일리천에서 무너지고, 황산에서 밀리고, 마성까지 쫓긴 상황에서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그는 동생 양검과 용검, 그리고 문무 관료들을 이끌고 왕건 앞에 나와 항복하였다.
이 항복은 신라의 항복과 성격이 달랐다. 신라는 경순왕이 직접 개경으로 가서 항복 의식을 치렀지만, 후백제는 전쟁에서 패배한 뒤 고려군 앞에서 굴복하였다. 왕건은 후백제를 군사적으로 완전히 제압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항복 의식은 전주성 안이 아니라 고려군의 위용이 드러나는 벌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장을 해제당한 후백제군은 이제 더 이상 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패배한 세력의 잔존 병력이었다.
왕건은 항복을 받은 뒤 곧바로 후백제 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일리천 전투에서 잡은 포로 3,200명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만은 아니었다. 포로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견훤의 귀부와 신검의 항복 소식이 후백제 전역에 퍼질 수 있었다. 왕건은 자신이 인자한 승리자라는 이미지를 심는 동시에, 더 이상 싸울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후백제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용서받은 것은 아니었다. 왕건은 능환을 불러 직접 꾸짖었다. 능환은 양검 등과 함께 견훤을 가두고 신검을 세운 정변의 핵심 인물이었다. 왕건은 그에게 “남의 신하 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는 취지로 질책하였고, 능환은 고개를 숙인 채 변명하지 못하였다. 결국 능환은 처형되었다. 후백제 멸망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었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통일의 숨은 공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롭게 고려 백성이 될 후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왕건은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양검과 용검도 무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귀양을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이들 역시 견훤을 몰아낸 정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항복 직후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귀양을 보낸 것은 왕건의 정치적 계산으로 볼 수 있다. 막 항복한 세력을 상대로 즉각적인 피의 숙청을 벌이면 후백제 사람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왕건은 먼저 질서를 잡고, 시간이 지난 뒤 위험 인물을 제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신검에 대한 처리는 더 복잡했다. 신검은 후백제의 왕으로 항복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신라의 경순왕처럼 대우받는 듯했다. 왕건은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남의 위협 때문이었다고 보아, 두 아우보다 죄가 가볍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특별히 죽이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용서라기보다 당장의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에 가까웠다. 『삼국사기』 견훤전에는 삼형제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어, 신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록 논란이 남는 부분이다.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견훤이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아들 신검을 죽이기 위해 고려에 몸을 의탁했고, 결국 후백제 멸망이라는 결과를 보았다. 그러나 정작 신검은 즉시 처형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아들을 죽이지 못한 원한,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허탈감이 견훤을 짓눌렀다. 그는 근심과 번민 속에 병을 얻었고, 황산의 절에서 며칠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견훤의 죽음은 왕건에게도 정치적으로 의미가 컸다. 견훤은 비록 패배하고 귀부한 인물이었지만, 여전히 후백제의 창업자였다. 그가 살아 있는 한 후백제 부흥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왕건에게 견훤은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인물이었지만, 통일 이후에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의 멸망을 본 뒤, 자신이 그리워하던 완산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황산 근처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견훤왕릉은 현재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일대에 전한다. 기록에는 견훤의 묘가 풍계촌에 있고, 속칭 왕묘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언에 따라 완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무덤을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의 모악산이 보인다고 하니,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견훤은 죽어서도 자신이 도읍했던 전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라의 경순왕이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것처럼, 후백제의 견훤도 자신이 그리워하던 땅을 먼 곳에서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항복 절차와 후백제 핵심 인물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난 뒤, 왕건은 전주에 입성하였다. 그는 전주에 들어가 “이미 큰 괴수들이 항복했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등용하였으며, 군령을 엄격히 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왕건은 전주를 약탈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적국의 수도였던 전주를 새로운 고려의 땅으로 안정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주는 이미 박영규가 장악해 놓은 상황이었다. 전주 사람들 역시 후백제의 멸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왕건이 곧장 전주로 들어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 적국의 수도였던 곳이었고, 신검 정권에 충성하던 인물이나 고려에 반감을 가진 세력도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왕건은 치안을 정리하고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 전주에 입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은 전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령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서 완성되는 일이었다.
왕건은 후삼국을 평정한 뒤 위봉루에서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남의 신하 된 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기 위해 「정계」 1권과 「훈요」 8편을 지어 국내에 반포하였다. 이는 단순한 승리 선언이 아니었다. 능환의 배신, 신검의 정변, 견훤의 몰락을 보며 왕건은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이 군사력만이 아니라 신하의 도리와 정치 질서에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후삼국 통일은 곧 고려식 질서를 세우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936년 12월, 왕건은 황산을 천호산으로 고쳐 불렀고, 연산에 개태사를 세우게 하였다. 개태사는 940년 12월에 완공되었으며, 고려의 호국사찰로 자리 잡았다. 이 절에는 왕건의 영정을 모셨고,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점을 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무대였던 황산은 이제 승리와 통일을 기념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피로 얼룩진 전장은 절과 의례를 통해 고려 왕조의 기억 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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