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견훤 앞에서 흔들리는 후백제군— 일리천 전투

크리티컬! 2026. 7. 1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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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년 가을 9월, 왕건은 마침내 결전을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 그는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병력을 합친 뒤, 곧바로 일선군으로 향하였다. 이에 맞서 신검도 병력을 이끌고 나와 고려군을 막았다. 양군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후삼국의 마지막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왕건은 천안부에서 곧장 남하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향을 틀어 일선군 쪽으로 향했다. 이 움직임은 후백제군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주었다. 신검도 첩자를 통해 왕건이 일선군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한 신검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일리천 쪽으로 진군하였다.

일선군은 오늘날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에 해당한다. 기록에는 왕건의 군대가 송선에 이르렀다고도 되어 있고, 일리천의 위치를 현재의 여차니진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여차니진은 낙동강과 가까운 곳으로, 이 일대에는 냉산과 숭신산성, 칠창리와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다. 왕건이 머물렀다는 전승, 말을 먹였다는 태조산 전승도 함께 전해진다. 단순히 전투가 벌어진 벌판이 아니라, 왕건의 남진과 관련된 기억이 여러 지명에 겹겹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신검은 왜 굳이 일리천으로 나왔을까. 신검은 왕건의 군대가 일리천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군사를 이끌고 요격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백제 전역의 병력을 끌어모아 전쟁에 나섰다. 고려에 밀리고 있던 후백제였지만, 아직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병력과 장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신검으로서는 방어만 하다가 고려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기보다, 고려군이 완전히 합쳐지기 전에 승부를 걸 필요가 있었다.

신검의 처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방어를 택하면 안전해 보일 수 있었지만, 고려군이 어디로 공격해올지 알 수 없었다. 몇몇 성에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대군의 움직임을 막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전 병력을 한곳에 모아두면 다른 길이 열릴 수 있었다. 특히 고려가 낙동강 상류 지역을 장악하면 강주 방면으로 내려가 후백제의 배후를 압박할 수 있었다. 신검은 결국 일리천에서 먼저 승부를 보려 했다.

왕건이 일리천을 전장으로 택한 이유도 전략적이었다. 일리천은 낙동강을 활용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병력을 이동시키거나 남쪽으로 전선을 넓히기에 유리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진 양상을 보면, 낙동강 자체가 직접적인 전투 수단으로 크게 활용되지는 않았다. 왕건이 일리천을 택한 것은 단순히 강 때문만이 아니라, 후백제군을 끌어내고 강주 방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략적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택으로 보인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의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이 동원한 병력은 87,500명에 이르렀다. 거의 10만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고려 중앙군뿐 아니라 각 지역에서 올라온 병력까지 포함된 총력전이었다. 멀리 명주의 김순식도 군대를 이끌고 왔고, 견훤 역시 고려군 편에 섰다. 후백제를 세운 왕이 이제 후백제를 무너뜨리는 전장에 서게 된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견훤은 고려군 진영에서 말을 타고 후백제군을 바라보았다. 이 장면은 일리천 전투의 가장 극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후백제 병사들에게 견훤은 단순한 망명객이 아니었다. 그들이 섬기던 옛 주군이자, 후백제라는 나라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가 고려군 편에 서 있는 모습은 신검 정권의 정통성을 뿌리째 흔들었다. 후백제군이 크게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이때 후백제 장수 효봉·덕술·애술·명길 등 네 명이 갑옷을 벗고 창을 버린 뒤 견훤이 타고 있던 말 앞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왕건은 이들을 위로하고 신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에서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대목은 후백제군 내부가 이미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적진의 장수들이 전투 초반부터 신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것은, 사실상 전장의 균형이 깨졌다는 뜻이었다.

왕건은 곧바로 진격을 명령하였다. 고려군은 일리천을 건너 후백제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양군은 들판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고려군 앞에는 왕건이 있었고, 그 곁에는 견훤이 있었다. 후백제 병사들 입장에서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조차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건은 대장군 공훤에게 명해 바로 적의 중군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군은 삼군과 함께 일제히 돌격했고, 후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3,200명이 사로잡히고 5,7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된다. 특히 신검이 있던 중군이 집중 공격을 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려군은 단순히 넓게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후백제 지휘부의 중심을 곧장 찔렀다.

후백제군의 붕괴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기록에는 적들이 장검을 휘둘러 저희끼리 서로 공격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실제로 자중지란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견훤을 지지하는 군사들이 신검을 지지하는 군사들을 공격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졌고, 고려군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전세를 장악할 수 있었다. 신검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일리천 전투의 승리는 왕건의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선군 지역의 호응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김선궁이라는 인물이 언급된다. 그는 후백제가 쳐들어왔을 때 송선에서 사람들을 모았고, 고려에 협력한 인물로 전해진다. 이는 일리천 일대의 지역 세력들이 왕건에게 호응했음을 보여준다. 전투의 승패는 병력 숫자만이 아니라, 현지 민심과 지역 호족의 선택에도 달려 있었다.

첫 전투에서 패한 신검은 고아읍 일대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고려군은 도망치는 후백제군을 계속 추격했고, 후백제군은 더 이상 싸울 의지도 힘도 잃어갔다. 결국 신검은 전주성을 향해 퇴각하였다. 일리천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전투 패배가 아니었다. 후백제가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군사적 가능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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