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견훤 최후의 도박 — 운주성 전투

크리티컬! 2026. 7. 1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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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4년, 왕건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運州)를 정벌하러 나섰다. 이 무렵 충청 지역의 요충지였던 운주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왕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성을 먼저 점령하고 진영을 갖췄다. 그 소식을 들은 견훤은 중무장 정예병인 갑사(甲士) 5천 명을 뽑아 직접 이끌고 운주로 향하였다. 견훤으로서는 밀리는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는 결의였다. 그가 알지 못했지만, 이것이 후백제 대왕으로서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었다.

운주에 도착한 견훤은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왕건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양편의 군사가 서로 싸우니 형세가 양편이 다 보전하지 못하겠소. 무지한 병졸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합시다"는 내용이었다. 이 서신에는 고려 건국 직후 삼국분할정립안을 제의했던 그 시절 약속을 상기시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운주성은 본래 후백제 영역으로 확정된 땅인데 고려군이 침범한 것이니 물러나달라는 요구이기도 하였다.

이 화친 요청을 두고 왕건의 진영에서는 논의가 벌어졌다. 견훤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운주 일대에서 다양한 실리를 챙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정예병 갑사 5천과의 정면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 전투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왕건이었기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법도 하였다. 그러나 유검필은 단호하게 반대 의견을 아뢰었다. "오늘날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신들이 적군을 무찌르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 유검필은 견훤의 화친 요청이 진심이 아니라 방심한 고려군을 치기 위한 위장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싸움은 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하는 전투라고 판단하였다. 왕건은 유검필의 뜻을 따랐다.

견훤이 거느리고 온 5천의 갑사는 중무장을 갖춘 정예군이었다. 사서에서 갑사로 표현되는 예는 흔하지 않다. 견훤은 어쩔 수 없이 운주성 전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고려군을 반드시 꺾기 위해 최정예 병력을 이끌고 왔던 것이다. 이에 맞서 유검필이 선택한 전술은 경기(勁騎), 즉 빠른 기병이었다. 중무장 보병인 갑사에 대한 유효한 전술은 기동성이 뛰어난 경기병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경기병은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활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데 강점이 있어, 무거운 갑옷을 입은 갑사의 방어를 측면과 후방에서 무력화할 수 있었다.

유검필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후백제군이 진영을 갖추기 전에 강한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였다. 견훤의 갑사 5천 중 무려 3천여 명이 목 베였다. 책사 종훈(宗訓)과 의사(醫士) 훈겸(訓謙), 그리고 용맹한 장수 상달(尙達)·최필(崔弼)이 사로잡혔다. 갑사 부대의 반 이상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 부상자까지 합친다면 갑사 부대는 재기 불능 상태에 놓였다. 유검필의 기습에 자신의 정예군을 과신했던 견훤은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전주로 퇴각한 견훤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운주성의 위치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으로 비정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운주성의 구체적인 위치로는 월산산성, 즉 해풍현성(海豊縣城)이 가장 유력하다. 백월산의 정상부에 자리한 테뫼식 석성으로 둘레는 약 850m이며, 이전에 해풍현의 고을 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기마전이 이루어진 것은 월산산성 앞의 벌판이었을 것이다. 왕건이 먼저 운주성을 점령하고 배후에 운주성이라는 고지를 끼고 후백제군을 맞아 싸웠기 때문에, 고려군은 지형적으로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운주성 전투의 패배가 가져온 여파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였다.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가운데는 충청 지역의 곡창지대인 합덕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합덕 일대는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며 곡물이 넉넉하여 후백제의 군량 조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전설에 따르면 견훤이 군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합덕방죽을 만들었다고 전해질 만큼 이 지역은 후백제의 핵심 병참 기지였다. 그 합덕 지역을 고려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다.

운주성 패전 이후 견훤은 더 이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후백제 왕으로서의 마지막 전투치고는 참혹한 패배였다. 정예병 갑사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한 정치적·군사적 책임과 압박은 심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서둘러 후계자 문제에 방점을 찍고자 했는데, 장남 신검이 아닌 넷째 금강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면서 후백제 내부의 권력 갈등이 폭발하는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운주성 전투의 패배는 단순한 전쟁의 패배가 아니었다. 견훤 자신의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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