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견훤의 패주 — 고창 전투의 결정적 순간과 역전의 드라마

크리티컬! 2026. 7. 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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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필이 왕건에게 귀부하였다고 해서 고창 전투가 바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계속 싸움을 벌여나갔다. 현지 세력의 지원을 업었다고 하여 고려군이 곧바로 우세해진 것만도 아니었다. 양군은 여전히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투를 종식시킬 결정적인 한 방을 모색하였다. 이때 움직인 사람이 바로 고려 최고의 무장 유검필과 삼태사, 즉 김선평·권행·장길이 이끄는 향군이었다. 이 두 세력의 움직임이 고창 전투의 승리를 왕건이 차지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저수봉에 계속 주둔하고 있던 유검필은 고심 끝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작전을 감행하였다. 어둠이 깔리는 밤을 틈타 후백제군을 기습하는 야습이었다. 야습은 전쟁에서 일상적인 전술이기도 하였다. 서로가 일격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습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언제 어디로 기습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방비하는 측에서는 허를 찔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기습의 묘미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후백제군은 저녁에 기습을 당할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장소까지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검필은 후백제군의 본대를 후미에서 공격하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진모래 쪽을 기습하였다.

진모래는 후백제군의 수로 병참로였다. 유검필은 저수봉에서 소수의 군대를 차출하여 보병만으로 군대를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두컴컴한 정월 21일 자정 전후, 눈썹 같은 하현달이 떴다. 이를 신호로 유검필이 이끄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검은 옷을 입은 채 수풀을 통하여 남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진모래에 도착한 이들은 진모래 서쪽 언덕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후백제군을 발견하였다. 그 즉시 조용히 급습하여 진모래와 그 주변에 주둔해 있는 후백제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석산의 후백제 본대에 공급될 보급 물자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시뻘건 화염이 새까만 하늘을 찌르듯이 치솟았기에 고려군과 후백제군 모두 이 사실을 포착하게 되었다. 후백제군으로서는 병참로가 끊어졌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고려군은 환호하였다. 이 작전이 실패할 경우 고려군이 오히려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컸기에 유검필의 결단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러나 도박은 성공하였다.

후백제군의 악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중립을 지키던 안동 지역 호족들이 고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삼태사인 김선평·권행·장길은 후백제 보급로에 대한 정보를 유검필에게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진모래 기습이 가능해졌다. 삼태사가 전투 막바지에 고려군과 결탁하였기에 후백제군으로서는 육상 보급로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양쪽 보급로에 모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후백제군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고 해도 굶주려가면서 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고려군은 선필의 귀부, 후백제군 보급로 차단, 고창 지역 호족 세력의 가세로 사기가 드높아졌다. 결국 견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퇴각이었다.

결정적인 전투 장면은 사서에 짧게 남아 있다. 드디어 서로 싸우다가 저물녘이 되었는데, 유검필이 날쌘 군사를 이끌고 저수봉으로부터 공격하니 견훤은 패하여 달아나고, 그의 시랑(侍郞) 김악(金岳)은 사로잡혔으며 후백제 군사로 죽은 자가 8천여 명이었다. 고려왕이 입성하여 유검필에게 "오늘의 승첩은 경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영가지(永嘉誌)』에는 당시 내물이 시체로 인해 흐르지 못하여 물이 거꾸로 흘렀다고 기록할 정도로 전투는 치열하였다.

이 전투와 관련된 지명들이 안동 일대에 여럿 남아 있다. 진목(陳木) 또는 질목은 고려 태조와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싸운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부터 80년 전까지만 해도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심은골(솜은골)은 고려군이 숨은 골짜기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흰들은 양쪽 군사들이 진을 친 들이라는 뜻이다. 원산·석산은 견훤 군사들이 저수봉에서 패한 뒤 이곳 석산을 근거로 하여 건너편 병산의 고려 태조군과 오백 보를 두고 대치하며 대접전을 벌인 곳으로 전해진다. 물불등(물부뚝)은 병산 전투 때 고려군의 수공으로 물이 넘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인데, 현지 지형과 계절을 고려하면 실제 수공보다는 지명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보인다.

퇴각하기 직전 후백제군과 고려군 사이에서 마지막 일대 교전이 있었다. 가수천(加水川) 변에서 벌어진 이 혈전은 수많은 전설로 남았다.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이어서 삼태사가 소금을 풀어 쫓아냈다는 이야기, 가수내·간수천·역수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하천의 전설들이 그것이다. 물론 과장이 섞인 이야기들이지만, 당시 전투가 가수천 일대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벌어졌는지를 구전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에는 "일천 기병이 험조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무너져 달아났고 위장은 머리를 바쳤다. 왕씨의 의기가 동남쪽에서 크게 펼치게 된 것은 바로 이 싸움이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막곡(幕谷) 지명 전설은 안동 호족들의 적극적 참전을 보여준다. 이 마을에서 지역 호족들이 의병을 일으켜 막을 치고 주둔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고창 전투는 단일 전투가 아니었다. 저수봉 전투·진모래 전투·병산 전투·합전교 전투·송야교 전투까지, 여러 장소에서 복합적으로 치러진 전쟁이었다. 8천여 명의 전사자는 병산 전투만의 수치가 아니라 이 여러 전투들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합산한 숫자로 보아야 한다.

고창 전투의 승리가 갖는 의미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고창의 성주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이에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4여 군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왕건은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동쪽 주·군 부락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명주에서 흥례부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공산 전투의 패배로 기세가 꺾였던 고려는 고창에서 단숨에 반전의 계기를 잡았고, 이 승리를 발판으로 후삼국의 주도권은 돌이킬 수 없이 왕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안동의 차전놀이(동채싸움)는 이 전투를 형상화한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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