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유검필의 저수봉 점령과 고창 전투의 서막

크리티컬! 2026. 7. 3. 19:16
반응형

929년, 후백제군은 공산 전투의 승리를 발판 삼아 경상북도 일대를 집중 공략하고 있었다. 가을 7월에 견훤은 갑졸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義城府)를 침공하였다. 의성부의 성주 장군 홍술(洪術)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왕건은 슬피 울면서 "내가 양쪽 손을 잃었다"고 탄식하였다. 견훤은 또 순주(順州)를 침공하였고, 겨울 10월에는 고사갈이성을 치려 하니 성주 흥달이 이를 듣고 나가 싸우고자 목욕을 하다가 갑자기 오른팔 위에 '滅' 자가 생겨남을 보았고, 그 후 10일 만에 병들어 죽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후백제군의 공격로는 낙동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후백제는 지금의 의성·안동·문경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특히 순주성(順州城) 확보를 통하여 안동, 즉 당시의 고창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후백제는 지금의 문경 마고성인 고사갈이성의 확보를 통하여 조령천을 장악하고, 계립령을 통해 고려와 신라가 연결되는 길목까지 차단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창군에 주둔해 있던 고려군 3천 명이 포위되었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예안진(禮安鎭)에서 여러 장수들과 향후 방책을 논의하였다. 기록은 당시 왕건 진영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왕건이 여러 장수에게 "싸움이 만약에 불리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대상 공훤과 홍유가 "만약에 불리하면 죽령으로 쫓아 돌아올 수 없으니 미리 간도(間道)를 받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미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왕건이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퇴로 문제였다. 죽령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한 사실은 죽령을 이미 후백제군이 장악했음을 뜻한다. 만약 패배하였을 때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왕건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상 공훤과 개국공신 홍유가 간도를 미리 확보해 두자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둘째는 공산 전투의 트라우마였다. 왕건은 공산에서 죽다 살아났다. 한번 각인된 내상(內傷)은 쉽게 극복하기 힘든 속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왕건은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설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창 주변의 호족들 역시 생각보다 호의적이지 않고 관망하는 형세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왕건과 견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호족들의 운명이 엇갈렸기 때문에, 급적이면 전쟁에서 중립을 택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결단을 내린 인물은 후삼국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유검필(庾黔弼)이었다. 다른 장수들은 서로 미루는 상황이었지만, 유검필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왕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병은 흉기요 싸움은 위태한 일이라 하였으니, 죽는다는 생각이 있고 산다는 마음이 없은 다음에야 가히 결전할 것입니다. 지금 적을 앞에 두고 먼저 달아날 것을 염려함은 어찌된 일입니까. 만약에 구원하지 못하게 된다면 고창의 3천여 무리를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줌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바랍니다." 왕건은 이에 따랐다. 유검필은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는 것부터 이야기하는 분위기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유검필이 지목한 전략적 핵심 거점은 저수봉(猪首峰)이었다. 저수봉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에 따라 향후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아울러 고려군의 진격로와 병참로 확보 여부도 이 봉우리에 달려 있었다. 『대동여지도』에서 안동으로 들어서는 북쪽 통로는 두 갈래로 표시되어 있다. 북서쪽의 풍산에서 오는 길과 북동쪽의 예안에서 오는 길이다. 저수봉은 바로 이 두 통로의 사이에 위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수봉을 장악한다면 양쪽 길목을 동시에 장악하는 셈이 된다. 견훤은 미리 저수봉에 군대를 파견하여 고려군의 남하를 차단하려 하였고, 이를 간파한 유검필이 저수봉을 과감하게 공략한 것이다.

저수봉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었다. 『태등식지도』에서는 병산 아래쪽에 있으며 안동의 북서쪽을 에워싼 산으로 표현하였다. 저수봉의 위치 비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청주 정씨의 저수봉재사(猪首峰齋舍)이다. 이 재사는 정약예의 묘재와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안동의 재사』의 기록에 따르면 재사는 안동의 북쪽, 아름달골(저수봉) 아래에 있으며 주산은 북쪽에 위치한 아름달산(저수봉)이라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산은 동쪽으로 머리를 내민 산 모양이 돼지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저수봉'이라 하며, 마을은 서수리라고도 한다. 또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고창 땅에서 싸울 때 왕건이 이 산에서 숨어 싸웠다고 하며, 전투에서 이겼으므로 '재수가 좋다'고 하여 재수봉으로 불렸다는 전설도 함께 전한다. 저수봉은 행정구역상 와룡면 이하리에 속하며, 이곳과 병산은 근거리에 위치하여 저수봉 지명과 전승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유검필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지 않았다. 군대를 이끌고 직접 저수봉으로 쳐들어갔다. 유검필은 이곳에서의 고투 끝에 저수봉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하였다. 왕건은 그 군영에 들어가 유검필에게 "오늘의 승리는 경의 힘이로다"라고 하였다. 저수봉 점령으로 고려군은 고창 지역으로의 진입이 가능해졌다. 유검필의 저수봉 점령으로 인하여 왕건의 군대가 안동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견훤도 군대를 이끌고 연이어 공격해 왔고, 두 군대는 길목에서 맞닥뜨리게 되었기에 병산과 석산에 각자 진을 치게 되었다. 한 장수의 결단이 전세 전체를 뒤흔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