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고창 전투 이후 순식간에 바뀐 세력 판도

크리티컬! 2026. 7. 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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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전투의 패배로 견훤은 경황 없는 퇴각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후백제군은 퇴각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순주성(順州城)을 다시 공격하였다. 후백제군은 고창 전투 이전인 929년 7월에 이미 순주성을 한 차례 함락시킨 바 있었다. 그 6개월 뒤 고창에서 대패하고 퇴주하면서 다시 순주성을 공격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후백제군이 퇴각하는 경황 없는 상황에서 굳이 순주성을 다시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태조는 원봉이 이전에 세운 공을 고려하여 용서하여 주고"라는 기록에 함축되어 있다. 고창에서 후백제군이 고려군과 사활을 건 일전을 벌이고 있을 때, 후방의 원봉이 고려군을 위해 보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 그 때문에 견훤은 퇴주하면서도 응징 보복 공격을 단행하여 주민들을 약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견훤은 순주성 공격을 통해 경상북도 북부의 신라계 호족이나 친고려계 호족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들이 쉽게 왕건을 돕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투가 끝난 직후 정세는 기존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창의 성주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이에 영안(榮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4여 군현이 차례로 와서 항복하였다. 왕건은 2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렸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의 동쪽 주·군 부락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명주(溟州)에서 흥례부(興禮府)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왕건이 삼태사 즉 김선평·권행·장길을 대광과 대상으로 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들이 고창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다른 군현의 호족들에게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고려 왕건의 인자함을 더불어 항복하는 것이야말로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 주변의 무려 110여 성이 차례로 항복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서 관망하거나 혹은 은밀하게 후백제를 원조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고창 전투를 통해 후백제 군대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이와 맞물려 이제는 고려군이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이 지역 호족들은 대세가 왕건에게 기운 것으로 간파하였다.

왕건은 즉각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창 전투의 승전보를 알렸다. 신라로서는 후백제가 대패했다는 점에서 기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낭보는 또 한편으로는 고려가 신라에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신라는 3년 전에 후백제에게 수도가 철저히 유린되었고 국왕까지 살해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고려가 그러한 후백제를 꺾었다. 그럼으로써 힘의 균형추가 고려 쪽으로 급속히 쏠렸음을 천명하였다. 그 누구도 더 이상 고려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선포한 것이다.

고창 전투의 승전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후백제의 직접적인 영향권이 아닌 지역은 모두 고려에 복속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국 한 번의 전투로 후백제가 여태까지 우세했던 상황이 급반전하여 고려의 우세로 역전되었다. 이후 후백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고려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창 전투가 지닌 의미는 각별한 것이다.

왕건은 고창 대승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견훤 트라우마에서 마침내 벗이날 수 있었다. 공산 참패 이후 견훤과의 대결에서 소심한 모습을 그리던 이가 왕건이었다. 그러나 고창 전투 이후 삼한 통합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결국 그 염원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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