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 전투 이후 정세는 서서히 후백제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중립을 지키던 신라 지역의 호족들이 고려 쪽으로 귀부하는 상황이 일어났고, 나아가 후백제 내부의 호족들까지 고려 쪽으로 항복하는 일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례가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龔直)의 귀부였다. 932년 6월,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견훤의 부하 공직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견훤에게 막대한 타격으로 다가왔다.
공직은 연산 매곡 사람으로 본래 매곡성의 장군이었다. 그는 후백제 견훤에게 귀부하여 후백제를 섬겼고, 자신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전주에 인질로 보내 놓은 상태였다. 공직은 매곡성을 지키면서 고려와 맞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왕건에게 항복한 것이다. 『고려사』 열전은 공직의 귀부 동기를 구체적으로 전한다. 공직이 일찍이 전주에 입조하였다가 그 잔인무도한 것을 보고 아들 직달에게 "지금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하다. 나는 비록 심복으로 있었지만 다시는 여기로 오지 않겠다. 고려 왕공은 능히 백성을 안정시킬 만하고 난폭한 자를 금제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귀순하려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고 하였다. 직달이 이에 동의하면서 공직은 마침내 결심하고 왕건에게 귀순하여 왔다.
그러나 공직이 고려에 귀부한 직접적인 원인은 표면적인 명분보다 현실적 이해관계에 있었다.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가 대패한 이후 고려의 임박한 기세가 가까이 다가왔다. 공직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매곡성 일대도 고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공직은 자신의 영역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힘이 우세하다고 판단된 왕건에게 귀부한 것이다.
고려로 귀부한 공직에 대한 견훤의 대가는 혹독하였다. 견훤은 공직의 귀부에 크게 분노하여 당장 공직의 자식들을 끌어다가 더 이상의 호족 이탈을 막기 위한 본보기로 불로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공직이 귀부를 권유했던 아들 직달의 목숨마저 빼앗아 버렸다. 이 사건만 놓고 본다면 견훤을 잔인무도한 위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당시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928년에 견훤이 오어곡성을 함락시켰을 때, 이곳에 주둔하던 고려 장군들이 후백제에 항복하자 왕건 역시 즉각 그들 가족에게 보복하여 저자거리에서 처형하였다. 난세에 반역에 대한 응징은 양쪽 모두 예외가 없었다.
공직의 근거지였던 매곡산성은 현재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에 위치한다. 매곡산성은 금강의 작은 지류인 회인천이 남쪽으로 곡류하는 동쪽에 해발 186.5m의 작은 산 위에 축조되었다. 주변에는 작은 계곡들이 산골에서 내려오면서 형성된 충적평야와 구릉이 발달하였다. 매곡산성은 석축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대체로 남북으로 길쭉한 타원형을 이루며 남북 길이 200m, 동서 너비 120m의 반달형을 하고 있다.
고려에 귀부한 공직은 자신의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그 방편으로 공직은 매곡산성과 인접한 일모산성(一牟山城) 공격을 왕건에게 제의하였다. 백제의 일모산군은 자신의 고을과 접경인데, 귀순한 결과로 인해 항상 와서 침범하고 약탈하므로 백성들이 생업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곳을 공격 점령하여 백성들이 약탈을 당하지 않고 오로지 농업과 양잠에 힘쓰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백제가 염려한 상황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임과 동시에 왕건이 바라던 바였다. 때문에 왕건은 7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일모산성을 공격하였다. 다만 이때 일모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같은 해 마지막 기사에 "다시금 일모산성을 공격해서 공파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일모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미천리의 양성산에 소재한 양성산성이다. 일모산군은 고려시대에는 연산군, 조선시대에는 문의현이었으며, 이곳은 매곡산성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세력권 하에 있었던 서원경, 즉 청주 지역과 일모산성은 이전부터 맞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곡산성이 고려 영역이 되자 일모산성은 청주와 매곡성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는 형세가 되었다. 사실 일모산군을 가리키는 연산군, 즉 연산진은 고려가 오래전부터 얻고자 했던 땅이었다. 925년에 유검필은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연산진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을 죽인 일이 있었고, 928년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연산군 지경에서는 길환을 목 베었다"며 자랑하기까지 했다. 왕건에게 일모산성 점령은 오랜 숙원이었다. 공직의 귀부는 그러한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양성산성은 이중의 포위망 속에서 함락되었고, 후백제는 충청도 내륙 방어선에 또 하나의 구멍이 생기는 치명적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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