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명장 유검필과 왕자 신검, 사탄에서의 운명적 대결

크리티컬! 2026. 7. 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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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 기습 이후 고려 조정으로 복귀한 유검필에게는 곧바로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왕건은 유검필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의성부(義城府)로 파견하였다. 신라를 향한 후백제군의 공세가 다시 거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백제군이 혜산성(槥山城)과 아불진(阿弗鎭) 등지에 이르러 사람과 재물을 겁탈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아불진은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일대로 추정되며, 경주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후백제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경주로 처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려나 신라로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왕건은 유검필에게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고 명령하였다.

유검필은 무거운 짐을 안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작전에서 그가 선발하여 인솔한 병력은 겨우 장사(壯士) 80명에 불과하였다. 대규모 병력이 아닌 소수 정예로 움직인 것이다. 사세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기에 속도를 우선시한 판단이었다. 유검필은 사탄(沙灘)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인데, 다만 그대들이 같이 희생당할 것이 염려되니 그대들은 각자가 살 도리를 잘 강구하라." 장수 스스로 죽음을 각오한다는 선언이었다. 병사들은 한목소리로 답하였다. "우리들이 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만을 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이들은 오직 한마음으로 적을 공격할 것을 서로 맹세하고 사탄을 건넜다.

사탄을 건너자 뜻밖의 상대가 나타났다. 후백제의 통군(統軍) 신검(神劍) 왕자가 이끄는 군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객관적인 병력 차이는 압도적으로 후백제군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유검필 군대의 대오가 정예로운 것을 본 후백제군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흩어져 도망쳤다. 비록 이 기록은 고려 측의 과장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유검필의 부대가 후백제군을 완전히 압도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다.

이 전투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신검이다. 신검은 견훤의 맏아들로, 견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왕위 계승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배다른 동생인 금강 왕자가 견훤의 총애를 받으며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검에게는 눈부신 군공을 세워 자신이 후백제 국왕에 걸맞은 인물임을 증명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고려의 지장(智將)이자 용장(勇將)인 유검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증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박관념 속의 신검은 오랜 세월 전쟁에 숙달된 노련한 유검필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80명 대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싸움에서 후백제군이 무너진 것이다.

유검필은 경주로 당당하게 입성하였다. 경주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노인과 어린이들까지 모두 성 밖에 나와서 영접하며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뜻밖에 오늘 대광(大匡)을 뵙게 됩니다. 대광이 아니시면 우리들은 백제군에게 살육 당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신라 스스로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후백제군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절박한 현실의 표출이었다. 공산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는 자력으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사실상 소진된 상태였다. 유검필은 경주에 7일간 머물다가 귀환길에 올랐다.

그런데 귀환 도중 신검이 또다시 나타났다. 사탄 전투의 대패를 설욕하고 일전의 수치를 만회하고자 유검필의 예상 회군로에 매복을 깔고 기다린 것이었다. 군공을 세워야 한다는 신검의 절박함은 오히려 그를 또 한 번의 패배로 이끌었다. 유검필은 이 기습을 격파하고 적장 금달(金達)·환궁(歡弓) 등 7명을 생포하였으며 살상·포로로 잡은 숫자 또한 심히 많았다. 신검은 두 차례 연속으로 유검필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패전은 신검의 위신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고, 결정적으로 견훤의 눈 밖에 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신검이 불러일으킨 정변과 견훤의 유폐라는 비극은 어쩌면 이 전투에서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승전 보고를 받은 왕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유검필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왕건은 직접 궁전에서 내려가 맞이하며 그의 손을 잡고 "그대 같은 공훈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유검필은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으며 위급에 직면하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께서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라고 사례하였다. 사탄 전투의 승리로 후백제의 경상북도 지역 진출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신라의 존속도 조금 더 이어질 수 있었다. 유검필이라는 한 인간의 결기가 전쟁의 흐름을 다시 한번 바꾸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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