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2년 9월, 견훤은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뒤집을 대담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길찬 상귀(尙貴)를 사령관으로 한 후백제 수군이 예성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 염주(黃海道 연안)·백주(黃海道 배천)·정주(개성 풍덕) 등 세 고을의 배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 목장에 있는 말 300필을 약탈하여 갔다. 국경 지대에서 맞대치하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대규모 기습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왕건이 일모산성을 공격한 지 불과 2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 기습 작전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해상 세력 판도를 먼저 살펴야 한다. 고창 전투 이후 육지에서 연패를 거듭하고 있던 견훤은 반전의 돌파구를 해상에서 찾았다. 마침 929년경 나주 지역이 다시 후백제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이를 기반으로 후백제의 해군력은 크게 증강되어 있었다. 935년에 왕건이 여러 장군들에게 "나주 지방 40여 군이 후백제에게 약탈당해 6년간 바닷길도 통하지 않았다"고 한 기록에서 929년을 전후한 시점에 나주가 후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음이 확인된다. 견훤은 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36계 중 8번째 계략인 암도진창(暗渡陳倉)을 구사하였다. 정면으로 공격하는 척하면서 몰래 병력을 우회시켜 적의 허를 찌르는 방책이었다.
후백제 선단의 실제 목표는 배 100척을 불사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진짜 목표는 왕건이었다. 정주와 백주는 개경의 남쪽과 서쪽으로 지척지간이다. 그 사이로 흘러가는 예성강의 동편에 고려 도성이 소재하였다. 후백제 상귀는 고려 도성으로 진입하여 불바다를 만들고 왕건을 살해하고자 한 것이다. 풍덕은 고려 최대의 해군 기지였다. 후백제는 이곳 선박들을 불살라버려 고려 해군력을 소진시키는 동시에 개경 상륙작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만약 후백제군이 개경에 상륙하여 왕건을 살해했다면 전세는 일시에 역전되는 것이었다.
『고려사』 박수경전에는 "발성(勃城) 전투에서 태조가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박수경이 힘껏 싸운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발성은 발어참성(勃禦塹城)의 줄인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발어참성은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축조를 건의한 성으로, 궁예는 896년에 왕건에게 송악에 발어참성을 쌓도록 명령하고 왕건을 성주로 삼았다. 훗날 황성(皇城) 성벽은 발어참성의 성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았는데, 이는 발어참성이 고려 왕궁과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발성 전투는 후백제 선단이 예성강을 통해 개경에 상륙하여 왕궁까지 공격해 들어온 사건이었다. 왕건이 자신의 왕궁 안에서 포위당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중요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측 기록에서는 극도로 축소되어 있다. 국가의 심장부인 왕궁이 적군에게 유린되었고 왕건의 생명까지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고려 조정이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징성이 지대한 고려 왕궁성에서의 전투를 '발성 전투'라는 이름으로 축소시키고, 말 300필 약탈과 선박 100척 방화라는 재산상의 손실 기록만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박수경의 용전과 충성을 과시하기 위한 서술인 '박수경전'에서만 어절 수 없이 이 전투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습 상륙작전은 이렇게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다.
견훤은 9월의 전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10월에 다시금 해군 장군 상애(尙哀) 등을 보내어 대우도(大牛島)를 침략하였다. 왕건이 대광 만세(萬歲) 등을 보내 대우도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불과 한 달 전인 9월에 고려군 함대 상당수가 불에 탄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의 해군 동원에는 한계가 있었고, 때문에 만세는 후백제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에 걸친 후백제군의 기습은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고려는 이로부터 한동안 해군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였다. 이 위기를 해결한 것은 당시 유배 중이었던 유검필이었다. 유검필은 곡도(谷島, 현 백령도)에 귀양을 가 있었지만 후백제의 공격 소식을 듣고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저는 비록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백제가 우리의 해변 지방을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곡도와 포을노의 장정들을 선발하여 군대를 편성하고 또 전함도 수리하여 방어하게끔 되었으니 주상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보고 왕건은 울면서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은 것은 나의 불찰이다"라고 하면서 사신을 보내 유검필을 소환하고, "그대는 실로 죄 없이 귀양을 살게 되었건만 일찍이 원한하거나 울분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일만 생각하였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고 후회된다"며 위로하였다. 곡도와 포을도에서는 고기잡이를 하면서 해상 생활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많았기에, 유검필은 이들을 기반으로 군대를 편성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고려 해군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왕건은 그러한 유검필의 공로를 높이 사서 귀양에서 풀어주고 재기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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