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경순왕의 항복과 신라 멸망의 내막

크리티컬! 2026. 7. 1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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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 신라 경순왕(敬順王)은 군신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단 하나였다. 나라를 왕건에게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 신라는 이미 스스로를 지킬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927년 견훤이 경주를 유린하고 경애왕을 살해한 이래, 신라는 이름만 남은 빈 껍데기나 다름없었다. 경순왕 자신도 견훤의 손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견훤마저 이제 고려에 귀부한 처지가 되었으니, 신라의 형세는 더 이상 버틸 명분도, 버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순왕이 항복을 결심한 데는 현실적 판단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포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더 이상 싸우다가는 백성들만 희생될 뿐이라는 인식이 그의 결단을 이끌었다.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대다수는 항복에 동의하였지만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과 의사들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지, 어찌 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경순왕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 같으니 형세가 능히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않고 또 약하지도 않아서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수가 땅에 부서지게 함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다"라고 하였다.

935년 11월,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고려에 보내어 국서를 올리고 항복을 청하였다. 왕건은 이를 받아들이고 태자 왕무(王武)를 시켜 교외에서 경순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개경에 도착하자 왕건은 교외까지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신라가 고려에 복속한 것이다. 왕건은 경순왕을 극진히 대우하였다. 경순왕을 정승(政丞)으로 삼아 태자보다 윗자리에 두었고, 신라를 경주(慶州)로 고쳐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또한 경순왕에게 자신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적극적인 회유책이었다.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을 택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식을 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동생 범공(梵空)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신라 왕실의 마지막 남은 이들이 택한 길은 이렇게 달랐다. 항복인가 은둔인가. 그 어느 쪽도 천 년 왕국의 사직을 이어가는 길은 아니었다.

신라 항복의 의미는 단순히 하나의 왕국이 소멸했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신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자적 국가로서의 실질적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어 오던 신라의 권위가 소멸하는 순간, 삼국 가운데 마지막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왕건에게 후백제와의 일전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명분을 부여하였다. 신라로부터의 귀부로 왕건은 삼한의 정통 계승자임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고, 마지막 남은 후백제와의 결전에서 대의를 선점하는 효과를 얻었다.

신라의 멸망은 또한 후백제 내부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견훤이 고려에 귀부한 데 이어 신라마저 고려의 품 안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이미 운주성 전투의 대패로 흔들리고 있던 후백제 신하들의 심리를 더욱 동요시켰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인식이 후백제 내부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신검의 정변과 견훤의 유폐, 그리고 견훤의 고려 귀부로 이어지는 사건들은 이러한 내부 동요와 무관하지 않았다. 천 년 왕국 신라의 조용한 퇴장은, 역설적으로 후삼국 최후의 결전을 향한 시계를 빠르게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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