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신라 하대의 정치개혁은 왜 실패했나

크리티컬! 2026. 7. 1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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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의 역사는 왕위쟁탈전과 귀족들의 분열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혼란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역대 국왕들은 무너져가는 집권체제를 다시 세우려 하였다. 율령을 정비하고 관청의 이름과 기능을 개편했으며,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측근기구와 문한기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목적은 비교적 분명했다. 진골귀족들이 장악한 기존 정치질서를 통제하고, 행정조직을 국왕 중심으로 다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국왕은 진골귀족을 억제하면서도 그들의 협력을 받아야 했다. 왕권을 강화하려면 골품제의 특권을 줄여야 했지만, 정권을 유지하려면 골품제의 최상층인 진골귀족을 보호해야 했다.

신라 하대의 정치개혁은 바로 이 모순 위에서 추진되었다. 법과 제도를 고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개혁을 실제로 집행할 정치적 힘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율령을 다시 세워 왕권을 강화하려 하다

신라는 법흥왕 7년인 520년 율령을 반포하였다. 중국의 법과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신라는 중국의 율령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당시 신라 사회에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혈연집단과 귀족들의 특권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율령 수용은 처음부터 제한적이고 타협적인 성격을 띠었다. 국가는 법에 따라 백성과 관료를 통제하려 했지만, 유력한 혈족집단과 귀족의 권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골품제 역시 율령의 보호를 받으며 신라 사회의 공식적인 신분질서로 자리 잡았다. 개인의 혈통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과 맡을 수 있는 관직이 정해졌고, 혼인과 주택, 의복, 수레와 생활용품까지 신분별로 제한되었다.

율령이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수단이었다면, 골품제는 진골귀족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하는 제도였다. 처음에는 두 제도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권이 강해지면서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국왕이 율령에 따라 모든 관료와 백성을 일원적으로 통치하려면 혈통에 따른 특권을 줄여야 했다. 그러나 골품제는 진골귀족이 높은 관직과 정치권력을 독점하도록 보장하였다. 법과 행정에 따른 국가 운영을 강화할수록 진골귀족의 혈통적 특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중대의 경덕왕이 관청과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친 것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경덕왕은 신라 고유의 귀족적 질서를 약화시키고 중국식 관료국가에 가까운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경덕왕의 개혁은 진골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혜공왕대에 들어서자 경덕왕이 중국식으로 바꾼 관청과 관직의 명칭은 다시 옛 신라식 이름으로 돌아갔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혁이 귀족들의 반발로 되돌려진 것이다.

780년 혜공왕이 피살되고 신라 하대가 시작된 뒤에도 율령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방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대의 무열왕계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 원성왕계 역시 유교 정치이념과 율령에 기반을 둔 집권체제를 추구하였다.

원성왕은 788년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국학 학생들의 유교 경전 이해 수준을 평가하여 상·중·하의 세 등급으로 나누는 제도였다. 활쏘기와 같은 무예보다 유교적 학식을 기준으로 관료를 선발하려는 시도였다.

소성왕대에는 국학에 녹읍을 지급하여 교육기관의 재정적 기반을 보강하였다. 이는 유교 지식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고, 혈통만이 아니라 학문과 행정능력을 갖춘 인재를 국가 운영에 활용하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곧바로 골품제에 따른 관직 독점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독서삼품과가 시행되어도 진골이 아닌 사람이 중앙의 최고 관직에 오를 수는 없었다. 학문을 기준으로 인재를 평가하려 했지만, 실제 정치적 진출의 한계는 여전히 혈통에 따라 결정되었다.

애장왕대에는 보다 직접적인 율령과 관제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805년 8월 조정은 공식 20여 조를 개정하여 반포하였다. 구체적인 내용 전체는 전하지 않지만, 일부 조항을 통해 당시 개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와 주요 사찰을 관리하는 성전의 장관·차관 명칭이 신라 고유의 금하신·상당에서 중국식 명칭인 영과 경으로 바뀌었다. 예작부·선부·상사서 등 여러 관청에서는 대사 이하의 일부 하급 관직을 줄이는 감원도 시행되었다.

관직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보기 좋게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혈통과 전통에 의존하던 신라식 귀족정치를 중국식 율령 관료체제로 개편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불필요한 관직을 줄인 조치 역시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국왕의 통제력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애장왕대의 공식 개정이 이루어질 당시 집사부 시중은 김수종이었다. 그는 훗날 흥덕왕으로 즉위하여 율령과 관제를 통한 집권체제 정비를 다시 추진하였다.

흥덕왕은 김헌창의 난 이후 갈라진 진골귀족들을 다시 정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느슨해진 국가질서와 신분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여러 귀족가문을 화합시키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흥덕왕의 개혁 의지는 그의 왕릉비 조각에 남은 ‘격식시개’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흥덕왕대에 국가의 격식, 즉 법령과 시행규칙을 편찬하거나 수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흥덕왕 4년인 829년에는 국정 운영의 핵심 관청인 집사부의 명칭이 집사성으로 바뀌었다. 집사부는 진덕여왕 때 설치된 이후 국왕의 명령을 받아 여러 행정관청을 통제하던 기관이었다. 그 장관인 시중은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국정을 총괄하였다.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칭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하나는 집사부의 권한이 커지면서 당나라의 상서성과 같이 여러 관청을 통솔하는 상급기관으로 승격되었다는 견해다.

신라 하대에는 시중을 지낸 사람이 상대등에 오르고, 다시 왕이 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시중에서 상대등을 거쳐 국왕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승진 경로가 만들어지면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도 이전보다 높아졌다. 이에 따라 ‘부’보다 높은 의미를 지닌 ‘성’으로 관청의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견해에서는 집사부가 당나라의 문하성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집사부 관리가 지방관 인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기록으로 볼 때, 단순히 행정을 집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왕의 명령과 정책을 검토하는 기능까지 담당했다는 것이다.

집사성이 당나라의 어느 관청과 정확히 대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경덕왕대에도 고유한 이름을 유지했던 집사부가 흥덕왕대에 중국식 명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나라 제도를 겉으로 모방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위쟁탈전과 귀족들의 반란으로 흔들리는 국가를 다시 조직하기 위해 국정의 중심기관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조치였다. 집사부의 집사성 개칭은 흥덕왕이 추진한 두 번째 관제개혁이라 할 수 있었다.

흥덕왕의 개혁정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834년에 반포한 교서였다. 교서는 당시 신라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생활규범이 무너지고 사치가 확산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흥덕왕은 사람에게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신분에 따라 명칭과 법식, 의복이 달라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외국에서 들어온 진기한 물건만 숭상하고 신라에서 생산된 물건은 천하게 여기면서 지나친 사치에 빠졌다고 지적하였다.

왕은 옛 규정에 따라 생활질서를 바로잡겠다고 명령하고, 고의로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국법을 적용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따라 진골·6두품·5두품·4두품과 일반 백성에게 허용되는 의복과 수레, 생활용품과 주택의 기준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 교서는 겉으로는 귀족들의 사치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왕경에서는 금으로 집을 장식한 이른바 금입택이 등장할 정도로 진골귀족의 호화생활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신분질서가 흔들리면서 낮은 신분의 사람들도 상위 신분의 복식과 생활방식을 모방하는 일이 늘어났다.

흥덕왕은 사치를 제한하고 신분별 생활규범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교서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었다.

교서는 진골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는 각 신분의 생활을 규제했지만, 국왕과 왕실가족은 이러한 규제의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어 있었다. 이는 국왕을 단순히 진골귀족 가운데 가장 높은 인물이 아니라 모든 신분 위에 존재하는 특별한 군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골품제에 따르면 국왕도 진골귀족에 속하였다. 다른 진골귀족은 국왕을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기보다 같은 혈통집단에서 나온 대표자로 인식할 수 있었다.

흥덕왕은 생활규범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국왕을 골품제의 최상위 신분을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로 세우려 하였다. 중국 황제가 일반 귀족과 구별되는 절대적 지위를 가졌던 것처럼, 신라왕도 진골귀족 위에 군림하는 권위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흥덕왕의 개혁에는 처음부터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 있었다. 그는 김헌창의 난 이후 갈라진 진골귀족들의 연대와 협력을 회복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진골귀족의 정치적·사회적 우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해야 했다.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면 율령체제를 확립하고 모든 관료를 법과 행정조직에 따라 통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는 진골귀족이 누리던 특권을 제한하고 그들에게도 법을 강제해야 했다.

진골귀족의 특권을 보장해야 귀족들을 정권 안에 묶어둘 수 있었지만, 그 특권을 줄이지 않고서는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 수 없었다. 골품제를 강화하는 일과 율령체제를 강화하는 일은 함께 추진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흥덕왕이 교서를 통해 진골귀족의 사치를 금지하더라도 이를 실제로 강제하려면 귀족들의 경제적 양보가 필요했다. 대토지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귀족들이 왕의 명령만으로 생활방식을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더구나 흥덕왕은 귀족들을 강제로 제압할 만큼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골귀족을 화합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을 규제해야 했기 때문에 개혁은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컸다.

흥덕왕의 정책은 당시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토지를 잃고 몰락하는 농민을 보호하거나 지방에서 커지는 사회적 불안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근친왕족들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는 권력구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관청의 이름을 바꾸고 생활규범을 다시 정했지만, 소수의 왕실가족이 상대등·시중·병부령과 같은 핵심 관직을 차지하는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흥덕왕의 개혁은 법과 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귀족들의 특권을 실제로 제한하지는 못하였다. 강제할 힘이 없는 규정은 현실을 바꾸기 어려웠다.

흥덕왕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왕족들은 다시 왕위를 놓고 무력으로 충돌하였다. 그가 율령과 격식을 정비하고 귀족들의 생활까지 통제하려 했지만, 정작 왕위를 평화롭게 계승할 제도조차 확립하지 못한 것이다.

흥덕왕 사후 불과 2년여 동안 왕위계승자와 두 명의 국왕이 희생되었다. 이는 흥덕왕의 화합정책과 율령개혁이 정치세력 사이의 긴장을 잠시 억제했을 뿐, 갈등의 원인을 해소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왕의 측근과 문인들로 새로운 권력기구를 만들다

왕위쟁탈전이 진정된 뒤 문성왕대에 신라는 일시적인 안정을 되찾았다. 조정은 다시 관제를 개편하고 집권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경문왕이 즉위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면서 유교적 교양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863년 국학을 찾아 박사와 교수관들에게 유교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의 아들 헌강왕도 879년 국학을 방문하였다.

국왕이 국학을 직접 찾은 기록은 신라 전체를 통틀어도 많지 않다. 혜공왕대 두 차례와 경문왕·헌강왕 부자의 방문 정도만 확인된다. 이는 경문왕계 왕실이 유교 정치이념과 관료교육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관제개혁은 『삼국사기』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 제작된 비석과 탑의 명문을 살펴보면 관청과 관직의 명칭이 대대적으로 달라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경덕왕 때 중국식으로 바뀌었다가 혜공왕대에 옛 이름으로 돌아갔던 관청들이 850년대부터 다시 중국식 명칭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궁전은 진각성, 영객부는 사빈부, 내성은 전중성, 사정부는 숙정대로 불렸다. 병부의 차관인 대감은 시랑으로, 대사는 낭중으로, 노사지는 사병으로 바뀌었다. 재정을 담당한 창부에서도 경은 시랑, 대사는 낭중, 조사지는 원외랑이라는 중국식 명칭으로 나타났다.

북방의 패강진을 지휘하던 두상대감도 9세기 말에는 도호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한 번에 모든 관청의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수십 년에 걸쳐 신라 고유의 관호가 중국식 관호로 점차 교체되었다.

이는 경덕왕대의 한화정책 이후 약 100년 만에 이루어진 두 번째 관호개혁이었다. 목적 역시 경덕왕의 개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추락한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고, 혈통과 가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귀족정치를 관료제 중심의 국가체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관직을 중국식으로 개편함으로써 국왕이 임명하고 통제하는 행정관료라는 성격을 강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개혁에서 더 중요한 변화는 공식적인 최고 행정기관보다 국왕 직속의 측근기구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기관이 세택을 개편한 중사성이었다.

세택은 본래 국왕을 가까이에서 시종하는 관청이었다. 경덕왕은 759년 관청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칭하였다. 혜공왕대에는 다시 세택이라는 옛 이름으로 돌아갔지만, 경문왕대에는 중사성이라는 명칭이 재차 사용되었다.

문성왕 17년인 855년까지만 해도 세택이라는 명칭이 확인되지만, 경문왕 12년인 872년 이전에는 이미 중사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사성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다.

중사성은 국왕 직속 기관과 태자 직속 기관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사인 또는 중사인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신라인들은 이들을 내양이라고도 불렀다.

사인의 본래 역할은 국왕이나 태자를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 이르면 단순한 시종을 넘어 국왕의 비서와 문한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명령서와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태자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일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왕의 비서실과 정책보좌진, 태자 교육기관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 셈이다.

중사성과 비슷한 시기에 선교성이라는 관청도 등장하였다. 선교성은 『삼국사기』의 관직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9세기 후반의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된다.

이 관청은 늦어도 헌안왕 4년인 860년 이전에는 설치되어 있었다. 국왕의 명령에 따라 가지산사를 관리하거나 지증대사 도헌과 같은 선종 승려를 산사로 호송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교성이라는 이름과 활동으로 보아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고 전달하거나 왕명을 직접 집행하는 기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사성과 마찬가지로 일반 행정기구가 아니라 국왕에게 직속된 특별한 관청이었던 것이다.

국왕들이 중사성과 선교성 같은 새로운 측근기구를 강화한 것은 기존의 집사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충실히 집행하는 기관으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사부는 진덕여왕 때 국왕 직속의 핵심 행정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중대 전제왕권 아래에서는 여러 중앙관청을 통제하고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며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집사부 자체가 유력 정치인들이 성장하는 기반으로 변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은 국왕을 보좌하는 관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위치로 발전하였다.

하대에는 시중을 거쳐 상대등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경문왕대의 위진은 현직 시중에서 곧바로 상대등에 올랐다. 시중과 상대등이 서로 대립하는 직책이라기보다 귀족정치 안에서 연결된 상하의 관직처럼 변한 것이다.

집사성은 형식상 국왕의 행정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진골귀족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통로가 되었다. 국왕이 집사성을 통해 귀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유력 귀족이 집사성을 장악하여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국왕은 집사성을 대신해 자신에게 직접 충성하는 새로운 내부기구를 필요로 하였다. 세택을 중사성으로 개편하고 그 기능을 강화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신라의 공식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성이 일종의 외정기관이 되었다면, 중사성은 국왕의 가까운 측근들이 모인 내조의 중심기관으로 성장하였다. 국왕은 중사성을 통해 자신만의 정치세력을 만들고 집사성이 가지고 있던 권한의 일부를 내부기구로 옮기려 하였다.

측근기구가 강화되는 것과 동시에 글과 문서를 담당하는 문한기구도 확대되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한기관은 상문사에서 출발하였다.

상문사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기관이었다. 외교문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한문 능력과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상문사에 소속된 관리는 성덕왕대에 통문박사로 불렸고, 경덕왕의 관제개혁 때에는 한림랑으로 바뀌었다. 상문사도 중국식 명칭인 한림대로 개칭되었다.

혜공왕대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을 보면 한림대에는 한림랑과 대조 등의 관리가 소속되어 있었다. 당나라의 한림원을 본떠 비교적 체계적으로 구성된 문한기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 후반에는 한림대가 서서원으로 개편되었다. 한림랑 대신 학사와 직학사라는 직책이 등장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숭문대는 숭문관으로 바뀌었고, 소속 관리인 랑도 직학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서서원은 국왕의 명령서와 외교문서, 비문과 각종 국가문서를 작성하는 중심기관이었다. 당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합격한 최치원과 박인범 같은 지식인도 서서원의 학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문한기구와 국왕의 측근기구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중사성과 숭문대, 서서원과 병부 등의 관직을 동시에 맡는 사례가 나타났다.

경문왕대의 명필 요극일은 숭문대의 관리로 있으면서 태자를 보좌하는 춘궁 중사성의 중사인도 겸하였다. 김원은 숭문관 직학사와 병부 낭중을 함께 맡았다.

최치원은 국왕에게 경전을 읽어주는 시독과 한림학사를 맡으면서 병부시랑 및 서서원의 업무까지 겸하였다. 국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비서관, 국가문서를 작성하는 학사, 중앙관청의 행정관 역할이 한 사람에게 결합된 것이다.

이는 중사성과 같은 근시기구와 서서원·숭문관 같은 문한기구가 사실상 하나의 국왕 측근집단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국왕은 유교적 지식을 갖추고 문장력이 뛰어난 관료를 가까이에 두었다. 이들은 왕의 교서를 작성하고 정책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외교문서와 국가의 공식 기록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문한관료의 상당수는 6두품 출신이었다. 진골귀족이 혈통을 바탕으로 최고 관직을 독점한 것과 달리, 6두품은 학문과 문장력을 통해 정치적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6두품에게는 관직 진출의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도 진골만이 맡을 수 있는 중앙관청의 장관이나 상대등과 같은 최고위직에는 오르기 어려웠다. 골품제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국왕과 6두품 관료의 이해관계는 서로 맞아떨어졌다. 국왕은 진골귀족의 정치적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혈통보다는 국왕의 신임에 의존하는 관료가 필요하였다.

6두품 관료는 진골 중심의 정치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후원자로 국왕을 선택하였다.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을 국가질서의 정점으로 보고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하였다.

국왕은 6두품 유학자들의 이론과 문장력을 이용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6두품은 국왕의 측근기관과 문한기관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중사성·선교성·서서원·숭문관의 성장은 이러한 정치적 결합의 결과였다.

경문왕과 헌강왕이 유학과 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도 문한관료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문왕은 865년 당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도성의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시로 지어 사신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 헌강왕도 사찰의 비문을 짓고 선종 승려와 문답을 나눌 정도로 높은 문화적 소양을 갖추었다.

헌강왕은 883년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각자 시 한 수를 짓게 하기도 하였다. 왕실 주변에는 유교와 문학에 능한 학사들이 모였고, 국왕 자신도 문인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측근기구와 문한기구의 강화도 신라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국왕이 중사성과 서서원을 중심으로 별도의 권력집단을 만든 것은 진골귀족을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국왕 측근집단의 성장은 진골귀족들과 국왕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다. 공식적인 행정조직과 귀족회의를 통해 정치세력을 조정하기보다, 왕이 소수의 측근과 문한관료에게 의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내조가 강화될수록 국왕의 뜻은 빠르게 전달될 수 있었지만, 정권의 기반은 오히려 좁아졌다. 왕과 가까운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넓은 귀족집단의 정치적 연대는 약화되었다.

문한관료들은 왕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뛰어난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지만, 군사력을 가진 진골귀족과 지방세력을 직접 통제할 수는 없었다. 유교 정치이념만으로 왕위쟁탈전과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기는 어려웠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높은 교양을 갖춘 군주였지만, 왕경 밖에서 점차 심각해지는 국가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관청의 명칭을 바꾸고 왕의 비서실과 문한기관을 강화하였지만, 지방통제력과 국가재정을 회복하는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율령을 개정한 흥덕왕의 정책과 측근·문한기구를 강화한 경문왕계의 정책은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흥덕왕은 법과 생활규범을 다시 세워 국왕 중심의 질서를 만들려 하였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국왕에게 직접 충성하는 비서와 유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개혁 모두 진골귀족의 특권을 근본적으로 제한하지 못했다. 왕권은 귀족들의 지지를 잃을 수 없었고, 개혁을 강제할 군사력과 행정력도 부족하였다.

왕이 법을 고쳐도 귀족들이 따르지 않으면 제도는 작동하지 않았다. 국왕이 유능한 문인과 측근을 모아도 지방의 군사·경제적 변화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신라 하대의 국왕들은 무너지는 체제를 바라보기만 한 무능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율령과 관제를 정비하고 국학과 유교를 장려했으며, 국왕 직속기관과 문한기관을 확대하였다. 왕권을 되살리기 위한 여러 방법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보다 그것을 실행할 정치적 기반이었다. 신라의 국왕은 골품제 위에 서 있으면서 골품제를 넘어서는 군주가 되려 하였다. 진골귀족의 힘으로 왕위를 유지하면서 진골귀족을 통제하려 하였다.

율령과 골품제, 국왕과 진골귀족, 공식 관료기구와 측근기구 사이의 모순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정치개혁은 반복되었지만 왕이 바뀔 때마다 정책은 흔들렸고, 왕위계승전이 발생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제도도 쉽게 무너졌다.

신라 하대 정치개혁의 실패는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국가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이 왕실과 중앙정부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과 관청은 남아 있었지만, 그 법을 강제하고 관청을 움직일 국왕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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