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5년 2월, 흥덕왕 정권을 함께 이끌던 상대등 김충공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충공은 흥덕왕의 동생이자 왕위를 계승할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자식이 없던 흥덕왕에게 충공의 죽음은 단순히 가까운 가족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그동안 왕실 내부에서 유지되던 정치적 균형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흥덕왕은 충공의 뒤를 이어 사촌동생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신라 하대에는 왕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할 경우 상대등이 다음 왕으로 즉위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균정의 상대등 임명은 사실상 그를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인정한 조치로 볼 수 있었다.
흥덕왕은 가능하다면 자신의 조카 가운데 후계자를 선택하고 싶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시 충공의 아들 김명은 열아홉 살에 불과하였다. 정치적 경험도 부족하여 아버지가 맡았던 상대등의 지위를 곧바로 이어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균정은 시중을 지낸 경험이 있었고 김헌창의 난을 진압할 때 군대를 지휘한 공적도 있었다. 그는 충공의 딸과 혼인한 흥덕왕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경력과 혈연관계를 고려하면 충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균정만큼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흥덕왕은 균정을 상대등에 임명하는 대신 김명을 시중에 앉혔다. 원성왕의 장남 인겸 계통에 속한 김명과 셋째 아들 예영 계통에 속한 균정에게 각각 핵심 관직을 맡긴 것이다. 이는 두 왕족집단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 균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836년 12월, 흥덕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왕은 먼저 죽은 왕비와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은 남겼지만, 누가 왕위를 이어야 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당시의 정치적 관례에 따르면 현직 상대등이었던 균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균정 자신도 자신의 즉위를 당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변에는 이미 강력한 지지세력이 모여 있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아버지를 지지하였다. 우징은 두 차례나 시중을 역임한 정치적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균정의 매제인 김예징과 무주도독을 지낸 김양도 균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양은 김주원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성왕계와 왕위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해 온 태종무열왕계에 속하였다. 흥덕왕이 추진한 귀족 화합정책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 김양은 왕위계승전이 시작되자 균정의 편에 섰다.
그러나 시중 김명은 균정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명은 아찬 이홍과 배훤백 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김제륭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제륭은 균정의 조카였다. 균정의 형인 김헌정의 아들이었으므로 균정과 제륭은 모두 원성왕의 셋째 아들 예영의 후손이었다. 두 사람의 경쟁은 인겸계와 예영계 사이의 대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같은 예영계 왕족도 헌정의 후손과 균정의 후손으로 나뉘어 서로 왕위를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김명과 제륭의 관계는 혈연과 혼인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제륭은 김명의 매부였다. 충공의 딸이 제륭과 혼인했기 때문에 충공의 아들 김명에게 제륭은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김명은 자신이 직접 왕위에 나서기보다 매부인 제륭을 후보로 내세웠다. 아직 젊고 정치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던 김명이 제륭을 먼저 왕으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균정과 제륭을 지지하는 두 세력의 대립은 귀족회의나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양측은 궁궐 안에서 군대를 동원하며 왕위를 결정하려 하였다.
균정은 지지자들의 추대를 받아 왕을 상징하는 의례를 갖추고 적판궁으로 들어갔다. 그의 일족과 사병들이 궁을 지키며 즉위를 준비하였다. 상대등이라는 지위와 지지자들의 추대만 보면 균정의 즉위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자 김명과 이홍이 군대를 이끌고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김명 측의 병력은 균정 측보다 많았다. 왕경 한복판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군대를 나누어 서로 공격하는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전투 끝에 균정이 살해되었다. 김양도 배훤백이 쏜 화살에 다리를 맞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채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균정의 죽음으로 첫 번째 왕위계승전은 제륭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제륭은 왕위에 올라 희강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김명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이홍을 시중에 앉혔다.
왕위에는 희강왕이 올랐지만 실제 정치권력은 김명이 장악하였다. 김명은 최고 귀족관직인 상대등이 되었고, 그의 동맹인 이홍은 국정을 총괄하는 시중을 맡았다. 희강왕은 자신을 추대한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희강왕과 김명 사이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김명에게 제륭은 왕위에 오르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가까웠다. 균정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김명은 더 이상 희강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838년 1월, 김명과 이홍은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이들은 희강왕의 측근들을 공격하여 제거하였다. 자신의 지지세력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본 희강왕은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희강왕은 궁중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재위한 지 약 2년 만이었다. 조카를 왕으로 세웠던 김명은 결국 그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다. 그가 민애왕이다.
민애왕은 즉위 당시 스물두 살의 젊은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권은 출발부터 불안하였다. 균정을 지지했던 세력은 첫 번째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했지만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이들은 왕경을 떠나 새로운 반격의 거점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있었다. 우징은 아버지가 적판궁 전투에서 살해된 뒤 가족과 남은 병력을 이끌고 청해진으로 향하였다.
청해진은 장보고가 지휘하는 강력한 해상 군사기지였다. 828년 장보고의 건의에 따라 지금의 완도에 설치되었으며, 서남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와 당나라를 연결하는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청해진을 설치할 당시 김우징은 집사부 시중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청해진의 설치 과정에서 우징과 장보고 사이에 일정한 정치적 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우징이 장보고를 찾아간 것은 단순히 먼 지방으로 피신한 것이 아니었다.
장보고는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중앙정부가 공식적으로 설치한 군진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과 선박, 해상무역망은 왕경의 귀족들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837년 5월, 우징은 가족과 남은 군사를 데리고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다음 달에는 김예징과 김양순 등이 왕경을 탈출하여 우징에게 합류하였다.
민애왕이 즉위한 838년 2월에는 적판궁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탈출했던 김양도 군사를 모아 청해진으로 들어왔다. 균정 지지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청해진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징을 돕는 세력은 군인과 귀족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화엄종 승려 홍진도 평소 알고 지내던 우징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를 지원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장흥 천관사에서 화엄신중의 힘을 빌려 우징의 성공을 기원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왕위계승전이 왕경의 몇몇 왕족 사이에서만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지방의 군진과 사찰, 여러 지방세력도 각자의 관계에 따라 왕위경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징은 장보고에게 거병의 명분을 설명하였다. 민애왕 김명은 우징 개인에게는 아버지 균정을 죽인 원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대한 희강왕을 몰아내 죽음으로 내몬 반역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마침내 우징을 지원하여 민애왕 정권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오랜 친구인 정년에게 군사 5천 명을 맡겨 우징 세력에 합류하게 하였다.
청해진의 병력이 중앙의 왕위계승전에 직접 투입되면서 싸움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까지 왕경의 왕족과 중앙귀족이 자신들의 사병을 동원해 왕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지방의 군진세력이 왕을 세우기 위해 중앙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김양이 반격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평동장군이 되어 정년·염장·장변·낙금·장건영·이순행 등 여섯 장수와 함께 출정하였다. 김양순도 무주의 군대를 이끌고 이들에게 합류하였다.
반격군이 무주 철야현에 도착하자 민애왕 정권은 김민주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막게 하였다. 낙금과 이순행이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돌격하자 정부군은 크게 패하였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반격군은 왕경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였다. 839년 윤1월 19일, 이들은 달벌, 곧 지금의 대구 일대에 도착하였다.
민애왕은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의훈 등에게 군사를 주어 달벌에서 반격군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청해진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한 차례의 전투에서 정부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할 정도로 크게 패배하였다.
달벌 전투의 승패로 민애왕 정권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민애왕은 경주 서쪽 교외에 나와 있다가 정부군의 패배 소식을 들었다. 곁에 있던 신하들마저 모두 달아나자 왕은 홀로 월유댁으로 피신하였다.
839년 윤1월 23일, 민애왕은 반격군 병사에게 발견되어 살해되었다. 김명을 중심으로 한 정권은 그가 왕위에 오른 지 약 1년 만에 무너졌다.
청해진 세력과 김양의 군대는 김우징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신무왕이다.
신무왕의 즉위로 적판궁에서 시작된 왕위계승전은 일단 균정계의 승리로 끝났다. 아버지 균정은 궁궐 안의 전투에서 살해되었지만, 아들 우징은 지방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반격에 성공하였다.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뒤 패배한 민애왕 측 인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지 않았다. 그는 살해된 민애왕을 왕의 예에 맞추어 장사지냈다. 달벌 전투에서 민애왕의 군대를 지휘했던 대흔과 의훈 등에게도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패장들은 처형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은퇴생활을 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왕위쟁탈전으로 갈라진 귀족사회를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신무왕이 보복을 자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무왕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할 때 군사령관으로 활약했고 두 차례 시중을 지낸 경험도 있었다. 아버지가 왕위계승전에서 살해되자 청해진의 군사력을 활용하여 정권을 되찾는 정치적 판단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자신의 정책을 펼칠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하였다. 그는 즉위한 지 약 반년 만인 839년 7월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태자 김경응이 왕위에 오르니 문성왕이다.
문성왕은 아버지의 즉위를 도운 장보고에게 막대한 정치적 빚을 지고 있었다. 장보고는 군사 5천 명을 보내 민애왕 정권을 무너뜨린 최대 공신이었다. 왕실의 입장에서 장보고는 충성스러운 공신인 동시에 중앙의 왕위계승을 좌우할 수 있는 위험한 군사실력자였다.
문성왕대 초반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중앙귀족들은 해상세력 출신인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예무역 문제도 왕실과 장보고의 관계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거론된다. 한때 왕을 만들어낸 장보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제 왕실이 반드시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조정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고가 제거되면서 왕실은 청해진의 군사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계승전이 남긴 정치적 후유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전 시중 김양순이 파진찬 흥종 등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다 처형되었다. 849년에는 이찬 김식이 대흔 등과 역모를 꾸미다 역시 처형되었다.
신무왕을 지지했던 공신세력도 새 왕권과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왕을 세운 세력은 자신의 공로에 상응하는 정치적 대가를 요구하였고, 국왕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해야 했다.
855년 왕실의 가까운 친족들은 경주 남산의 창림사에 무구정탑을 세웠다. 계속되는 내란과 재난 속에서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불탑 건립에 담긴 염원은 당시 왕실이 느끼던 불안감을 보여준다.
문성왕은 재위 19년인 857년, 숙부이자 상대등인 김의정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의정이 왕위에 올라 헌안왕이 되었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종동생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충공의 딸이었으므로 인겸계와 예영계를 혼인으로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당나라에 숙위로 다녀왔고 시중과 상대등을 차례로 지낸 경험도 갖고 있었다.
문성왕과 헌안왕대에는 오랫동안 대립했던 왕실 두 계통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균정의 후손과 균정의 형 헌정의 후손이 혼인을 통해 다시 연결된 것이다.
문성왕의 여동생은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과 혼인하였다. 김계명은 문성왕대에 집사성 시중을 맡았다. 그의 아들 김응렴은 헌안왕의 사위가 된 뒤 왕위를 계승하여 경문왕이 되었다.
경문왕의 즉위로 왕통은 신무왕으로 대표되는 균정계에서 희강왕의 혈통인 헌정계로 다시 넘어갔다. 이는 과거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했던 헌정계가 혼인을 통해 왕통을 되찾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두 집안의 타협이 모든 갈등을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 왕통에서 밀려난 균정계 왕족과 일부 귀족들은 경문왕의 즉위를 불만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866년에는 이찬 김윤흥이 동생 숙흥·계흥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일족이 처형되었다. 868년에도 이찬 김예와 김현 등이 역모를 꾸미다 처형되었다.
874년에는 이찬 근종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공격하였다. 경문왕은 금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원성왕계 왕족들이 왕위를 놓고 벌인 경쟁은 830년대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반란과 숙청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왕위쟁탈전은 단순히 몇 명의 왕족이 왕관을 놓고 벌인 권력다툼이 아니었다. 원성왕의 후손들은 인겸계와 예영계로 나뉘었고, 예영계 안에서도 헌정계와 균정계가 서로 경쟁하였다.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혈연적 연대보다 각 가문의 직계 혈통과 정치적 이익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왕위계승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상대등이라는 공식적인 지위나 귀족들의 추대만으로는 왕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궁궐을 장악할 군사력과 유력 귀족의 지원, 지방세력과의 연대가 왕위를 결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장보고의 군사력을 빌린 사건은 중요한 변화였다. 중앙의 왕위계승전이 지방 군진의 개입으로 결정된 것이다. 국왕을 선택하는 힘이 더 이상 왕경의 진골귀족에게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장보고는 왕족도 중앙의 최고위 귀족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군사력으로 민애왕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무왕을 세울 수 있었다. 지방의 군사세력이 중앙정치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원성왕계는 왕위를 한 혈족 안에서 지켜냈지만 그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균정은 궁궐에서 살해되었고, 희강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민애왕은 반격군에게 피살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왕위는 군사적 승패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왕위를 독점하려 한 원성왕의 후손들은 서로를 제거하면서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왕권 자체를 약화시켰다. 왕을 결정하는 힘은 혈통과 제도에서 군사력과 정치적 연합으로 옮겨갔다.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쟁탈전은 신라 왕실의 분열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방 군사세력이 중앙정치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는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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