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9년 7월, 신라 왕궁에서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 일어났다. 어린 애장왕을 대신해 섭정하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언승이 동생 수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애장왕을 살해한 것이다. 언승은 곧바로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애장왕은 원성왕의 증손자였고, 언승은 원성왕의 손자이자 애장왕의 숙부였다. 왕위는 여전히 원성왕의 후손 안에서 이어졌지만,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라 숙부가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를 빼앗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원성왕계가 왕위를 독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내부에서도 왕위를 둘러싼 무력 충돌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변을 통해 왕위에 오른 헌덕왕은 정치적 야심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신라는 왕실 내부의 문제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헌덕왕대에는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면서 농업 생산이 크게 흔들렸고, 곳곳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하였다.
자연재해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국가가 재난에 대응하는 능력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성덕왕대에는 흉년이 들자 수십만 석의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정도로 국가의 재정과 행정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원성왕대에도 서울과 지방에서 기근이 발생하면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휼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헌덕왕대에는 재난이 발생해도 조정이 피해를 수습할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였다. 814년 서쪽 지방에 홍수가 일어나자 관리를 보내 백성을 위로하고 세금과 공물을 한시적으로 면제했지만, 이듬해 기근으로 도적들이 일어나자 군대를 보내 진압하는 데 급급하였다.
817년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고, 819년에는 초적이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820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이어지면서 겨울에 다시 기근이 닥쳤고, 이듬해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자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까지 나타났다.
신라를 떠나는 사람도 늘어났다. 중국 기록에는 기근을 피해 당나라 절동지방으로 건너가 식량을 구한 신라인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본 기록에서도 811년부터 824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백 명의 신라인이 일본 열도에 표착한 사실이 확인된다. 그들 모두가 기근을 피해 떠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신라 사회에서 대규모 유민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초적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동안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도 약해졌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원성왕계의 왕위 독점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등장하였다. 웅천주도독 김헌창이었다.
김헌창은 원성왕과 왕위를 다투었던 김주원의 아들이었다. 785년 선덕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신하들은 처음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이 왕궁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이 상대등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고, 그가 원성왕이 되었다.
김주원은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뒤 강릉으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김주원의 집안 전체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김주원은 혜공왕을 제거한 780년의 정변에 참여한 인물이었으므로, 원성왕계 역시 그의 가문을 함부로 외면할 수 없었다. 태종무열왕계의 유력자인 김주원 가문을 정계에 참여시켜야 새로운 왕통의 정치적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김헌창의 집안은 실제로 신라 조정에서 상당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김헌창의 형으로 추정되는 김종기는 원성왕대에 시중을 지냈고, 김종기의 아들 장여도 헌덕왕대에 시중에 올랐다. 김헌창 역시 지방에 밀려나 있던 무명의 인물이 아니었다.
김헌창은 813년 무진주도독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중앙정치의 핵심 관직인 시중으로 승진하였다. 816년에는 조카 장여에게 시중직을 넘긴 뒤 청주도독으로 이동하였으며, 821년에는 다시 웅천주도독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여러 지방의 도독과 시중을 역임하며 중앙과 지방에서 충분한 정치적 경험을 쌓은 최고위급 진골귀족이었다.
따라서 김헌창의 반란을 단순히 오랫동안 정치에서 소외된 인물의 복수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는 원성왕계 정권 안에서 고위 관직을 지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일을 끝내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원성왕계의 왕위 독점이 계속되고 애장왕마저 숙부에게 살해되자, 김헌창은 기존 왕조의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822년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37년 전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김헌창은 단순히 헌덕왕의 퇴위를 요구하거나 자신을 새로운 신라왕으로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이라 정하였다. 신라의 왕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 신라 안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사용한 것은 김헌창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정치권력을 세우려 했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헌덕왕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부당하게 왕위를 차지한 원성왕계의 계승자였다. 김헌창은 자신이 세운 장안국을 통해 무열왕계의 정치적 정통성을 되찾으려 하였다.
반란의 규모도 작지 않았다. 김헌창 세력은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도독과 국원소경·서원소경·김관소경의 책임자를 비롯해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반란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현재의 충청·전라·경상 지역에 걸친 광범위한 지방이 반란의 영향권에 들어간 셈이었다.
일부 지방관은 김헌창의 위협을 받아 반란에 가담하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는 지방관들이 중앙정부의 명령만 따르는 행정관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군사력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지방관이 김헌창에게 협조한 것은 아니었다. 청주도독 향영은 반란세력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고, 완산주장사 최웅 등은 왕경으로 달려가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김헌창이 여러 주와 소경을 장악하려 했지만, 지방관 전체를 하나의 세력으로 묶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다.
반란 소식을 접한 신라 조정은 매우 신속하게 움직였다. 헌덕왕의 동생으로 상대등을 거쳐 부군에 올라 있던 수종이 대응을 주도하였다. 부군은 태자에 준하는 왕위계승자의 지위였던 것으로 보이며, 수종은 왕실의 핵심 인물로서 반란 진압을 지휘하였다.
조정은 먼저 일길찬 장웅을 선발대장으로 파견하여 반란군의 움직임을 추적하게 하였다.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이끄는 본대를 출동시켰다. 다시 이찬 김균정·잡찬 김웅원·대아찬 김우징에게 세 갈래의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김균정과 그의 아들 김우징은 원성왕의 셋째 아들 예영의 후손이었다. 헌덕왕과 가까운 원성왕계 왕족들이 직접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나선 것이다. 원성왕계 내부에서는 이미 왕위계승을 둘러싼 경쟁의 가능성이 존재했지만, 외부에서 무열왕계가 왕통 전체를 위협하자 일단 공동으로 대응하였다.
명기와 안악이라는 두 화랑도 자원하여 토벌군에 참여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이 단순한 지방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과 왕통을 위협하는 대규모 내전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발대장 장웅은 도동현에서 반란군의 한 부대를 발견하여 격파하였다. 뒤이어 도착한 위공과 제릉의 본대가 장웅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정부군은 삼년산성의 반란군을 무너뜨린 뒤 속리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그곳의 반란세력도 진압하였다.
김균정·김웅원·김우징이 이끄는 세 군대는 성산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각지에서 작전을 벌이던 정부군은 차츰 김헌창의 본거지를 향해 포위망을 좁혔다. 김헌창은 광범위한 지방을 반란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반란군은 중앙군의 조직적인 진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여러 지역에서 차례로 무너졌다.
결국 정부군은 김헌창의 근거지가 있는 웅진으로 진격하였다. 양측은 성 밖에서 격전을 벌였고, 정부군이 반란군을 크게 물리친 뒤 성을 포위하였다. 포위가 열흘 이상 계속되고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김헌창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헌창이 죽으면서 장안국을 내세운 반란도 진압되었다.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김헌창의 일족과 추종자는 239명에 달하였다. 반란에 직접 가담한 사람뿐 아니라 그의 혈족과 정치적 관계자까지 대규모로 숙청된 것이다.
김헌창의 죽음으로 무열왕계의 도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3년 뒤인 825년 1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범문은 고달산의 산적 수신을 비롯한 100여 명과 연합하였다.
범문은 북한산성을 공격하고 그 일대를 장악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으려 하였다. 아버지가 충청과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면, 아들은 신라의 북서부를 거점으로 다시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범문의 반란은 김헌창의 반란만큼 확산되지 못하였다. 한주도독 총명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범문 세력을 빠르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김헌창 부자가 원성왕계의 왕위 독점에 맞서 일으킨 두 차례의 반란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김헌창의 난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규모와 의미는 한 귀족가문의 복수에 머물지 않았다. 김헌창은 여러 주와 소경을 반란에 끌어들이고 국호와 연호까지 정함으로써 신라의 국가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신라 내부에서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려 한 최초의 대규모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반란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사회의 불만이 있었다. 거듭된 재해와 기근에도 조정은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했고, 지방에서는 초적과 유민이 늘어나고 있었다. 김헌창은 아버지의 왕위 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반란의 확산에는 헌덕왕 정권의 무능과 원성왕계의 권력 독점에 대한 불만도 작용하였다.
그렇다고 김헌창의 난을 지방세력 전체가 중앙정부에 맞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도 없다. 일부 지방관은 반란에서 탈출하여 조정에 정보를 전달했고, 중앙군의 진압 작전에 협력한 세력도 많았다. 지방사회는 이미 하나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지역의 세력들 사이에서도 반란에 참여할 것인지 조정을 지지할 것인지를 두고 선택이 갈리고 있었다.
김헌창의 반란은 원성왕계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데 실패하였다.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헌덕왕의 형제와 김균정·김우징을 비롯한 원성왕의 여러 후손들은 공동으로 군사력을 동원하며 왕통을 지켜냈다. 외부의 도전 앞에서 원성왕계 왕족들의 결속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반란 이전의 질서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방의 도독과 군현 수령들이 중앙정부와 별도로 군사력을 움직일 가능성이 드러났고, 지방세력이 독립된 정치권력을 세울 수 있다는 선례도 남았다. 이는 훗날 지방 호족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흐름을 촉진하였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왕위 문제가 왕경 귀족들만의 다툼에 머물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왕위에서 밀려난 중앙귀족이 지방의 행정조직과 군사력을 이용해 새로운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원성왕계는 김헌창 부자의 도전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은 짧은 반란정권으로 사라졌지만, 신라 안에서 새로운 나라가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현실로 나타난 뒤였다.
'중세 > 후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궁궐에서 시작해 청해진까지 번진 원성왕 후손들의 왕위쟁탈전 (0) | 2026.07.14 |
|---|---|
| 역적의 친족까지 다시 불러들였다 — 흥덕왕의 진골귀족 화합정책 (0) | 2026.07.14 |
| 왕위도 재상직도 한 집안이 차지했다 — 원성왕계의 권력 독점과 직계 왕통의 탄생 (0) | 2026.07.14 |
| 백 년의 번영은 왜 왕의 죽음으로 끝났나 — 혜공왕 피살과 신라 하대의 시작 (0) | 2026.07.14 |
| 항복한 왕은 살리고, 반역의 설계자는 죽였다 — 왕건은 후백제를 어떻게 완전히 지웠나 (0) | 2026.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