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견훤이 신라 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다

크리티컬! 2026. 7. 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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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9월,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향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 직전까지 견훤은 공산 전투를 앞두고 전략적으로 고려와 신라 양쪽을 압박하면서 승기를 쌓아왔다. 조물성 전투 이후 양국 간 화친이 파탄에 이르렀고, 인질 진호의 죽음을 계기로 적대 관계가 본격화되었다. 견훤은 공산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신라를 먼저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왕건이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 언제든지 고려군이 배후에서 압박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견훤군의 경주 진격 경로는 고령 방면에서 내려오는 육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 조정은 이 소식을 듣고 즉각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왕건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이미 경주 성 안으로 돌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서에는 견훤이 경주를 기습하여 신라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왕비와 여러 신하들을 겁탈하거나 포로로 잡아가는 참혹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흥락을 즐기다 변을 당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사서에 따라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어쨌든 신라의 왕이 적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후삼국의 판도에서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한 후 경순왕(敬順王)을 새로운 신라 왕으로 세웠다. 이는 견훤이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르는 왕을 꼭두각시로 앉혀 신라를 통제하려 했음을 뜻한다. 경순왕은 사실상 견훤의 의중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이 시점에서 신라는 이름만 왕국일 뿐 실질적인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신라의 호족들 가운데 견훤에 동조하거나 관망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왕건에 대한 신뢰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경주에서 왕건 역시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견훤군이 이미 경주에서 뜻을 이루고 철수한 이후였다. 왕건은 경순왕을 위로하고 신라와의 관계를 다시금 다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경순왕에게 연회를 베풀고 신하들에게 후한 선물을 내렸다. 신라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왕건의 미안함과 신라를 내편에 묶어두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함께 작용한 것이었다.

견훤의 경주 입성이 가져온 가장 큰 결과는 고려와 후백제의 직접 대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신라가 사실상 견훤의 손에 넘어간 이상, 왕건은 더 이상 방어적 자세만으로는 상황을 버텨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왕건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견훤과 맞붙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전의 장소가 바로 대구 공산(公山)이었다. 경주 입성으로 정점에 달한 견훤의 기세는 공산 전투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표출되었고, 반대로 왕건은 이 전투에서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공산 전투에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왕건의 고려군을 사방으로 포위하여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다. 고려 장수들 가운데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이 전사하였고, 왕건 자신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숭겸은 왕건이 탈출할 수 있도록 자신이 왕건의 옷을 입고 적군의 시선을 끌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건으로서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패전이었으며, 신숭겸과 김락의 죽음은 고려 내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때의 패배는 이후 왕건이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견훤을 극도로 경계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주 입성과 공산 전투는 후삼국의 판도에서 명백히 견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극적인 승리의 이면에는 견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균열이 이미 싹트고 있었다. 경주를 유린하고 신라 왕을 제 손으로 죽인 견훤의 행위는 신라 출신 호족들과 백성들의 심리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이 폭력은, 오히려 왕건의 포용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그 균열은 훗날 신검의 정변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되어 결국 견훤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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