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왕봉규 축출 이후 경남 서부를 둘러싼 고려와 후백제의 쟁탈전

크리티컬! 2026. 7. 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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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4월, 고려군이 왕봉규 세력을 축출하고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그해 가을 7월, 왕건은 다시 강주 일대를 향해 군대를 움직였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닌 그 북쪽을 노렸다.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김락(金樂) 등을 보내어 대량성(大良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대량성은 지금의 합천 대야성으로, 920년에 견훤이 공략하여 후백제가 오랫동안 장악해왔던 요충지였다. 고려가 이를 되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뒤이어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견훤에게 대패를 당함으로써 경남 서부 지역 전체의 판도가 다시 요동쳤기 때문이다.

공산 전투 이후 경남 서부 지역에서 고려의 영향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견훤은 연승의 기세를 몰아 경상도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대량성을 비롯한 강주 권역의 여러 성들이 다시 후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고려로서는 왕봉규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남해 일대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직후 공산에서 당한 치명적 패배로 인해 전선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강주 일대의 패권이 이처럼 요동치는 사이에 또 다른 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강주장군 유문(庾文)이다. 유문은 윤웅에 이어 강주 지역에 등장한 호족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강주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유문의 세력 기반은 윤웅과 마찬가지로 진주를 중심으로 한 강주 일대였다. 그러나 유문의 행보는 윤웅이나 왕봉규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고려에도 후백제에도 확실하게 귀부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줄타기 외교는 강주가 갖는 지정학적 특성, 즉 고려와 후백제 양측 어느 쪽에서도 완전한 군사적 장악이 어려운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후백제를 대파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고려의 승기를 확인한 강주 일대의 호족들은 잇달아 고려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유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려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고창 전투 이후 왕건이 강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나가면서, 경남 서부 지역의 패권은 사실상 고려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강주 지역을 둘러싼 패권 다툼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남해 해상 세력의 향방이었다. 왕봉규 축출 이후 고려가 장악한 전이산·노포·평서산·돌산 일대의 해상 거점들은 고려의 남해 제해권 확보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 해상 거점들을 통해 고려는 나주와 강주를 잇는 남해 교통로를 장악하고, 후백제의 해상 활동을 억제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왕봉규라는 독립 세력이 사라진 자리를 고려가 채움으로써, 후삼국의 해상 패권 구도에서 고려는 한 걸음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결국 왕봉규 이후의 경남 서부 지역은 고려와 후백제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지배 아래 놓이지 않은 채, 전쟁의 흐름에 따라 지배자가 교체되는 격전지로 기능하였다. 왕봉규라는 제3의 세력이 사라진 뒤 이 지역의 판도는 결국 두 강대 세력의 직접 대결로 수렴되었고, 그 최종 결산은 고창 전투 이후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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