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강주를 둘러싼 호족들의 각축

크리티컬! 2026. 6. 2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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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康州)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晉州)를 치소로 하는 통일신라 9주의 하나였다. 강주의 치소인 진주는 교통의 요지에 소재했기 때문에 고려와 후백제는 강주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다. 그러한 강주 지역에는 고려나 후백제 이전에 제3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바로 천주절도사 왕봉규(王逢規)였다. 순암 안정복은 왕봉규에 대해 "왕봉규는 어떤 인물인지 모르며, 그의 전후 사실이 분명하지 못하여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듯 왕봉규는 후삼국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국제적으로 그 지위를 공인받았을 정도로 강한 세력을 형성했던 호족이기도 했다.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에서 일어난 왕봉규는 강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해상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왕봉규는 수계권의 장악을 통해 주변 지역을 하나로 묶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주는 신라 9주 중 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강력한 정치 세력이 존재할 수 있었다. 또한 정치 세력 외에 반란의 기점이 되었던 것으로도 추측된다. 896년(진성여왕 10)에 일어난 적고적(赤袴賊)의 기점을 '국서남(國西南)'으로 명기하였다. '국서남'은 나라의 서남쪽이나 왕경의 서남쪽을 가리키므로 경상남도 서남부로 지목된다. 적고적의 난이 경상남도 서남부 즉 강주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왕경의 서쪽인 모량리까지 진출한 것을 보면 강력한 형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적고적 세력은 신라 조정에서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지방의 다른 세력들이 자신들의 촌락과 주민들을 지키는 과정에서 적고적을 제압한 것으로 보인다. 적고적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의 결집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강주 지역에서는 여러 호족 세력들이 포착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주장군 윤웅(閏雄), 천주절도사 왕봉규, 그리고 강주장군 유문이다. 이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호족 세력으로서 지금의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며 할거하는 양상으로 추측된다. 먼저 윤웅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920년 봄 정월, 신라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내방하였다. 강주장군 윤웅이 그의 아들 일강을 보내어 인질로 삼으니, 일강에게 아찬을 제수하고 경의 행훈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아주었으며 낭중 춘양을 강주에 보내어 귀부함을 위로하였다.

920년 시점의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윤웅의 귀부는 어떠한 배경이 발단이 되었을까? 이보다 앞서 918년에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기존에 궁예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왕건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궁예 친위 세력과 왕건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빚어진 충돌로 생각할 수 있다. 궁예의 대외 노선은 신라에 대한 적개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신라에게 반독립적인 성향을 지녔던 호족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선언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귀부하는 일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9주 중에서 신라의 본래 영역이었던 3주는 상주·강주·양주였다. 이 중에서 상주에는 아자개가, 강주에는 윤웅이 대표적인 호족으로서 할거하였다. 아자개와 윤웅은 궁예의 반신라정책으로 인하여 반독립적인 채로 존재하였을 뿐 태봉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다. 궁예가 태봉을 장악하는 동안 이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자개는 왕건의 궁예 축출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아자개에 대해서는 공적 기록에서 '상주 적수(尙州賊帥)'라고 했다. 이는 말 그대로 상주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적인 세력이었음을 뜻한다. 아자개의 고려 귀부는 정권 초기 왕건의 취약한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왕건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자개가 귀부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그의 부하가 사신으로 오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왕건은 의식을 갖추어 맞이하도록 명령하였고 구정에서 의식을 연습하기까지 하였다. 왕건은 아자개의 귀부를 정치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경상북도 지역에 손을 뻗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궁예와는 달리 왕건이 신라 출신 세력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자 강주장군 윤웅도 이에 맞춰 반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2년 뒤인 920년에 윤웅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그 또한 아자개와 마찬가지로 사신을 보내어 귀부를 요청했다. 상주에 이어 강주를 대표하는 호족까지 고려에 귀부한 것은 고려의 세력 확장을 뜻한다. 그러나 강주까지 물리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지는 잠재되어 있었다. 강주 지역은 비록 윤웅이 대표 호족으로 웅거하고 있었지만 신라에 대한 충성은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신라와 고려가 통교하는 시점에 맞춰 고려에게 귀부한 것으로도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윤웅은 존왕(尊王)의 의(義)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현실적인 힘에서 고려를 따랐던 것이다.

한편 윤웅이 후백제에 대응한 현실적인 배경은 강주나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를 후백제가 차단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견훤은 일찍이 순천만을 장악하여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는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주 일대는 소외받거나 고립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후백제는 대야성 공격이라는 군사적 행동을 감행했다. 이는 강주 지역 진출을 위한 다중 포석의 하나로 해석된다.

후백제는 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열자 축하사절을 보낸 바 있다. 이후 양국은 별다른 교류 기록이 없다가 920년 9월에 이르러 후백제에서 공작선과 죽전을 고려에 선물하였다. 이때 후백제가 고려에 선물을 보낸 목적은 그 다음 달에 있을 대야성 공격에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려는 후백제는 물론이고 신라와도 통교를 한 상황이었다. 견훤이 대량과 구사를 점령하자 신라는 고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점 왕건을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더욱이 대량은 강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대량은 대야성이 소재한 지금의 합천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삼국시대 이래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후백제군은 대야성을 점령하여 경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강주 일대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후백제는 황강 수계권을 장악하여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었다. 후백제군이 대량군과 구사군을 점령한 후 진례군까지 진출하였다. 그러자 신라는 다급한 상황에 놓였다. 신라는 즉각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대야성을 공격하기 직전 선물을 보내기까지 하였던 후백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 때문에 후백제군은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왕건과 견훤 사이가 틀어졌지만, 양국은 즉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후 925년 10월의 제2차 조물성 전투를 계기로 양국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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