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4년, 후백제가 당시 신라 영역이었던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고려와의 7~8년에 걸친 우호 관계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견훤은 직접 나서지 않고 아들 수미강(須彌强)과 양검(良劒) 등을 보내 대야문소(大耶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조물성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수미강이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기록과, 고려 장군 애선(哀宣)·왕충(王忠) 등에게 명령하여 구원하게 하였는데 애선은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두 기사는 각각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술된 것으로, 조물성 전투의 양상을 간략하게 보여준다.
조물성 즉 금성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선산의 금오산성설, 안동 부근설, 김천 조마면설, 안동과 상주 사이설, 의성 금성설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물성은 의성으로 지목하는 것이 타당하다. 『용비어천가』에서 남양만 부근에 소재한 소홀도(召忽島)를 '조물셩'이라고 하여 '홀(忽)'을 '물' 즉 '골'로 읽고, 아울러 '소(召)'를 '죠'로 발음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물성은 조문국(召文國)이 소재했던 경상북도 의성 지역으로 비정된다.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 소재한 금성산성은 해발 530.1m의 금성산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약 2,730m, 높이는 4m, 너비는 2~4m로 했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m 내외이며 둘레는 4㎞ 정도이다. 이곳은 금성산 고분군(탑리와 대리 고분군)과 짝을 이루며 조문국 시절은 물론 후삼국시대에도 중요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물성이 자리 잡은 의성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금성산성을 점령하면 안동·청송 지역으로 진출이 용이해지고, 아시촌소경(지금의 의성군 안계면 일대)을 통해 안계평야를 장악할 수 있었다. 안계평야는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보기 드문 넓은 농토였기에 현지에서 군량을 보급받아야 하는 후백제의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곳이었다. 그러므로 후백제는 안계평야 일대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지역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후백제의 진출로 인하여 지방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경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후백제군이 경상북도 일대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손을 잡은 고려와의 연계도 쉽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이해 관계가 맞물려서 양자가 조물성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제1차 조물성 전투에서 활약한 견훤의 아들로 수미강과 양검이 보인다. 양검은 신검이 견훤을 축출할 당시 강주도독이었으며 견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견훤의 아들 중 처음 등장하는 수미강은 누구일까? 『삼국사기』 견훤전에는 이 전투의 지휘자로 수미강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 『고려사』에는 수미강에 이어 둘째 아들 양검도 기재되어 있다. 기록 순서로 볼 때 수미강은 양검의 형인 신검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름에서 수미강과 신검은 유사점이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수미강은 금강일 가능성이 높다. '금(金)'의 훈독인 '쇠'를 '소문'으로 표기하였음을 알게 되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게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금강의 이름이 양검의 앞에 배치되었다는 점은 금강의 군사적 능력이 양검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견훤이 말년에 후대의 왕좌로 금강을 앉히려고 하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제1차 조물성 전투의 구체적인 전황은 『고려사』 박수경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박수경은 평주 사람이고 부친은 대광위 지운(遲雲)이었다. 박수경은 성품이 용감하고 권모지략이 풍부하였다.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으로 임명되었다. 백제가 자주 신라를 침공하므로 태조가 박수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나가서 지키게 했다. 이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대상(大相) 재궁에게 상군을 맡기고 원윤 왕충에게 중군을 맡기고 박수경과 은녕에게 하군을 맡겼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오직 박수경 등만이 이전했다. 상군과 중군이 모두 무너지고 하군만 남은 상황에서 박수경은 끝까지 싸워 결국 후백제군을 격퇴시켰다. 왕건이 기뻐서 그를 원보(元甫)로 승진시키니 박수경이 말하기를 "제 형 박수문이 현재 원윤으로 있는데 저의 품위가 형의 위로 올라가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여 왕건은 드디어 다 같이 원보로 임명하였다.
이 전투에서 주목할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고려군의 중군을 이끌었던 왕충이다. 그의 존재는 이후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928년의 기록에서 왕충의 출신을 명지성(命旨城)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경기도 포천이다. 당시 고려군은 주로 지금의 경기도 지역 호족의 군대를 조물성 전투에 참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자신들의 고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조물성을 넘겨줄 수 없었고, 고려로서도 더 이상 후백제의 진군을 원하지 않았기에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어 조물성을 구원하게 하였다. 조물성은 신라 영역에 해당되지만 정확히는 독자적인 군대를 갖추고 있는 호족의 영역이었다. 조물성은 벽진군 장군 양문처럼 친고려계의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군대를 보내 구원해 주었다. 이때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기에 고려 장군 애선이 전사하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그러나 성 내의 저항이 완강하고 성 밖의 고려 구원군이 후백제군을 협공하였다. 그러자 후백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미강과 양검은 퇴각하게 되었다.
제1차 조물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군은 경상북도 일대로의 진출이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920년에 후백제군이 대야성을 합락하고 진례군까지 공격하였을 때 고려군이 구원군으로 와서 훼방을 놓은 것에 이어, 조물성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더 이상 두 나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표면적으로는 아직도 우호 관계를 보였지만 점차 대결 분위기로 전환하였다. 그럼에도 외교적 교류는 이어졌다. 924년 8월에 견훤이 사절을 파견하여 절영도(부산 영도)의 총마(驄馬) 한 필을 바쳤다. 총마의 출신지인 절영도를 굳이 명기해 놓았다는 점이 특이한데, 견훤은 이곳의 좋은 말을 왕건에게 보내주면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내는 달랐다. 단순히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총마 한 필을 보낸 것으로 보기에는 절영도라는 위치가 걸린다. 절영도는 신라 영역 동남쪽 끝에 자리 잡은 섬이다. 이곳의 명마를 견훤이 차지하였다는 것은 절영도까지 후백제의 힘이 미친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견훤이 총마를 왕건에게 선물한 것은 후백제의 강성함을 고려에게 알려주고자 한 것으로, 이는 과거에 견훤이 공작선과 죽전을 왕건에게 선물한 것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왕건의 향후 행동에 대한 경고 의미가 담겼다고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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