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나주 공방전의 전략적 의미와 그 유산

크리티컬! 2026. 6. 28.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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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지역은 항구적으로 태봉과 고려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오랜 기간 태봉과 고려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후백제 영역으로 편제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여름 4월에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요사이 후백제의 침략을 당하여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라고 묻자 공경들이 유검필(庾黔弼)을 천거하였다. 이 기사는 935년 이전, 즉 929년부터 935년까지 나주 지역이 후백제 영역 안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 935년에 유검필이 재탈환함으로써 다시금 고려 영역에 편제된 것이다.

929년은 후백제가 고려를 강하게 압박하며 승기를 잡고 있던 때였다. 이보다 2년 전인 927년에 견훤은 경주에 입성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그 직후 견훤은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고려군을 대파하기에 이른다. 930년 고창 전투 이전까지 후백제는 승승장구하면서 고려와 신라를 압박해 들어갔다. 929년에 이루어진 나주 탈환은 바로 이러한 상승세를 타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무렵 고려는 거듭된 패배로 악화되어 있었고 후백제에게 밀리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고려로서는 자연히 나주에 대한 방비 또한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견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를 보내 전격적으로 나주를 점령하였고, 그 전략은 주효하였다. 결국 929년부터 935년까지 나주 지역은 후백제 영역 안에 포함되었다.

935년, 상황은 극적으로 뒤바뀌었다. 후백제 내부에서 신검의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견훤이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던 금강 왕자가 피살되었고, 견훤 자신은 금산사에 유폐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견훤은 그해 6월에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갔다. 자신에게는 벼락스러운 땅이 나주였다. 그 나주가 결국 견훤의 최후 도피처가 된 것이다. 왕건은 이러한 견훤을 극진히 맞이하였다. 유검필은 물론이고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견훤을 직접 맞이하게 했다. 왕건은 그를 상보(尙父)로 일컬었고, 이러한 최상의 예우를 바탕으로 후백제 정벌에 견훤을 앞세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견훤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역설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되었다.

나주가 왕건과 후삼국 통일에 지닌 의미는 여러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나주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서남해안의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었고, 이곳을 점령하면 영산강 일대의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가능하였다. 당시 선승(禪僧)들이 출입했던 국제 항구인 회진도 나주에 소재하였고, 이 밖에 목포·석해포·덕진포 등 여러 항구가 있었기에 어느 지역보다도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해상 세력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나주 지역은 예로부터 해산물이 풍부한 데다 비옥한 곡창 지대를 끼고 있었다.

나주 지역은 전략적으로도 결정적인 요충지였다. 나주는 후백제 최초 수도였던 무진주와 근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후백제에는 늘 위협을 안겨줄 만한 곳이었다. 견훤은 정복 활동에 나서면서도 후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군이 나주에 집결하여 무진주 등을 공략한다면 반드시 구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견훤은 국토의 후방에 다대한 병력을 배치하여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주 지역을 왕건이 장악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견훤과 왕건은 나주 지역을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 하였고, 그 결과 빼앗고 빼앗기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왕건이 되었다. 나주는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주 경략은 왕건의 최대 업적으로 손꼽힐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궁예가 나주 경략에 나섰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왕건이 나주 경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궁예도 나주에 직접 내려와 견훤과 대치하면서 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왕건이 고려의 왕이 됨으로써 희미해지고 말았다.

나주 지역에서는 왕건에 대한 기억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고려 말의 인물인 윤소종(尹紹宗; 1345~1393)은 이 지역에 대한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에 "금성산은 바다 남쪽에 있으니, 태사(太祖)의 고장으로 5백 년 이어왔네. 한 척의 배로 진왕(甄王)이 귀순한 길이요, 일만 깃발 현묘(顯廟: 顯宗)가 출사(出師)했던 곳이라네. 홍룡사(興龍寺) 밖에는 서기(瑞氣)가 떠 있고, 개계원(開界院) 앞에는 흰 연기가 일어나네. 성조(聖祖: 太祖)의 누선(樓船)을 여기에서 맞았으니, 동정(東征)하는 오늘날 생각 그지없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나주가 단순한 전략 거점을 넘어 고려 건국의 상징적 장소로 기억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시다. 그 오랜 기억의 무게만큼, 나주 공방전은 후삼국의 판도를 바꾼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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