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제2차 덕진포 해전과 궁예의 나주 친정

크리티컬! 2026. 6. 2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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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년 제1차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진도·고이도·압해도·갈초도 등 서남해 도서들이 마진으로 넘어갔고, 나주의 덕진포와 석해포도 마진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주를 잃는다는 것은 후방의 목에 가시가 박히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직접 거느리고 나주성을 공격하였다. 열흘 동안 포위를 풀지 않는 집요한 공세였다. 그러나 궁예가 수군을 출동시켜 기습하자 견훤은 결국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견훤은 포기하지 않았다. 911년, 견훤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덕진포에서 궁예와 맞붙었다. 사서에는 건화(乾化) 2년(912)에 견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고 단 한 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짧은 기록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기록에는 분명히 견훤이 싸운 상대가 궁예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부분이 제2차 덕진포 해전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912년에 나주 경략을 직접 단행한 인물은 왕건이 아니라 궁예 본인이었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에 의하면 '대왕(大王)' 즉 궁예는 912년 8월에 몸소 군대를 이끌고 나주와 무주 등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을 공략하였다. 법경대사비문에도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비문에는 천우(天祐) 9년 8월에 전주(前主: 弓裔)께서 북쪽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시고 남쪽을 평정하고자 하시었다며, 큰 배들을 일으켜 친히 수레를 몰고 오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나주는 항복하였으므로 강가의 섬에 군대를 멈추었지만, 무부(武府)는 저항하였으므로 서울(邾鄒)에서 무리를 크게 일으켰다고도 기록되었다. 천우 9년은 연호 계산상 912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제2차 덕진포 해전 기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왕건이 즉위한 이후 궁예가 주연격인 사실이 배제된 탓이다. 왕건 즉위 이전 해인 911년의 기사만 수록함으로써 마치 이때 나주 경략이 마무리된 것 같은 인상을 주었고, 그 결과 견훤과 궁예가 서로 맞대결한 제2차 덕진포 해전은 역사 속에서 서서히 묻혀 간 것이다.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오늘날에야 그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왕건이 912년에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혜종의 출생을 통해서 확인된다. 혜종은 건화 2년 즉 912년에 출생하였다고 적혀 있다. 혜종의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로, 나주 시청 앞의 완사천이라는 우물 근처에서 왕건과 만났다고 전해진다. 이 우물은 지금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홍룡사에 대한 설화를 살펴보면 나주 지역의 세력가였던 오다련은 본디 목포(지금의 나주 영산포) 사람으로 나온다.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와 진수(鎭守)할 때 목포에 배를 정박하고 물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서려 있어서 그리로 가보니 장화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설화로 전해진다. 즉 왕건이 목포에 온 시점은 911년이며, 이는 909년 반남현 포구를 장악하고 2년 뒤인 911년에 목포(영산포)까지 나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궁예와 왕건이 나주를 지배한 후 태봉의 영토로 안정적으로 운용되는 듯했지만, 이후에도 후백제에서는 나주에 대한 공세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914년에는 궁예 역시 수군 장수의 지위가 낮아 적을 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왕건에게 시중 벼슬을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왕건은 정주(貞州) 포구로 가서 전함 70여 척을 수리하고 군사 2천 명을 싣고 나주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들은 후백제 사람들과 해상의 졸도적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건이 돌아와서 해상의 경제상 이익과 임기응변할 군사 방책들을 보고하니 궁예가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 만하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고도 전한다.

914년에도 후백제 사람들과 부근의 해적들이 다시 나주 지역에 손을 뻗히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주를 둘러싼 전쟁이 결코 단기간에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왕건이 전함 70여 척과 군사 2천 명이라는 상당한 병력을 직접 이끌고 내려가야 했다는 점 자체가, 이 지역에 대한 견훤의 갈망이 얼마나 집요하였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나주는 이후 견훤의 전쟁 수행에 있어 지속적으로 걸림돌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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