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 세력 내부의 친마진파와 친후백제파 사이의 갈등을 정리하는 데 있어, 왕건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동시에 주어져 있었다. 나주 내부를 결속시키는 일과, 그 결속을 흔들 수 있는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마침 왕건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오월국(吳越國)으로 향하는 후백제의 사신선에 대한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나주 지역 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외부와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반대 세력을 침묵시키는 이 전략을 왕건은 정확히 구사하였다. 그는 전라남도 영광 앞바다의 섬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견훤의 배를 기습적으로 나포하였다. 사서에는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鹽海縣)에 머물렀다가 이 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며 특별히 표창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한 차례의 기습은 여러 효과를 동시에 낳았다. 궁예는 후백제에 대한 중요한 외교 정보를 손에 넣었고, 나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반면 견훤으로서는 해상을 장악하지 못하면 이러한 일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사신선 나포 이후 왕건이 귀환하자 궁예는 즉시 추가 명령을 내렸다. 정주(貞州)에서 전함을 수리한 뒤 다시 나주로 내려가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있다. 염해현에서 귀환한 직후 전함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은, 사신선 나포 과정에서 이미 후백제군과 교전이 발생하였음을 뜻한다. 왕건의 수군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기에 정주로 돌아와 전함을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궁예는 이를 계기로 후백제 봉쇄 전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알찬 종희와 김언을 왕건의 부장으로 삼아 군사 2,500명을 딸려 광주 진도군(珍島郡)을 공략하게 하였다.
왕건의 마진군은 후백제군의 허를 찌르듯 진도군으로 직행하여 울돌목, 즉 명량해협을 장악하였다. 진도로 진입하려면 지금도 거대한 연육교를 건너야 하는 울돌목은 조선 수군의 명량대첩으로 익히 알려진 전략 요충지다. 울돌목 근처에는 망금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망금산 관방성(望金山關防城)이 소재하였다. 이 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곳으로, 울돌목 전체를 바라보는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마진군이 망금산 관방성을 목표로 삼아 나주에 기항하지 않고 진도를 기습한 것은 이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마진군은 진도 점령을 발판으로 삼아 서해와 남해가 연결되는 길목을 차단하였으며, 궁예의 영향력이 남해 일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진도를 점령한 뒤 왕건은 곧바로 고이도(皐夷島)를 향해 북상하였다. 그런데 이 공격 동선은 단순히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상식적인 동선이라면 정주를 출발하여 '염해현→고이도→압해도→진도' 순으로 공격하여 병참 루트와 후백제의 지원로를 끊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염해현→진도→고이도'의 순서를 택하였다. 압해도와 갈초도는 이 경로에서 빠져 있다가 오히려 덕진포 해전 이후에야 장악되었다. 이 역설적인 동선의 배경에는 당시 능창(能昌)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있었다.
고이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능창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능창은 압해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을 장악한 해적 집단의 수령으로, 해적과 해상(海商)이라는 양면성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적 본거지로 비정되는 압해도의 송공산성은 주변의 자은도·압태도·팔금도·안좌도·고이도·매화도·당사도 등 서남해 도서 전체를 조망하기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 조건은 왕건의 선단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왕건이 진도나 고이도를 공격하려면 무조건 압해도 해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고, 능창이 버티고 있는 한 어느 방향으로 선단을 움직여도 송공산성에서 포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능창은 덕진포 해전 이전까지는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고이도와 진도를 공격할 때 능창이 직접 방해한 흔적이 없다는 점, 능창이 갈초도의 무리를 모아 왕건의 군대에 대적하다가 점령당한 것이 이후의 일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주 세력과 능창의 관계를 보더라도, 내륙 수로와 해상 교역을 병행하던 나주 세력에게 능창은 공생 관계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마진이 나주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서남해 도서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왕건의 마진군이 고이도를 점령할 때 고이도의 관방시설이었던 왕산성(王山城) 인근의 군세가 항복하면서 전투는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마진군은 이로써 서남해 도서 공략의 중요한 거점을 하나씩 확보해 나갔다. 진도와 고이도 점령으로 마진군은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해상 길목을 장악하였고, 이후 능창과의 갈등이 본격화하기 이전까지는 서남해 도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넓혀 나갔다. 후백제로서는 오월국과의 외교 통로가 끊겼을 뿐 아니라, 서남해의 도서 세력에 대한 통제력까지 흔들리는 이중의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발판 위에서 나주 공방전의 최대 고비, 제1차 덕진포 해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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