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1년, 견훤이 나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이 공격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나주를 지키고 있던 세력이 곧바로 궁예에게 귀부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나주가 후백제에 등을 돌린 배경에는 견훤 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외 교역권을 빼앗기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결국 기회를 노리던 나주 세력은 견훤이 멀리 대야성 원정에 나선 틈을 타 후백제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습살하고 회진항을 직접 장악하였다. 이 반기를 접한 견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즉각 나주 방면으로 군대를 돌려 대대적인 응징에 나섰다. 그 보복의 거칠기는 '노략(擄掠)'이라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응징이 나주 민심을 다시 후백제 쪽으로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궁예에게 귀부하려는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나주를 매개로 견훤과 궁예 사이에 지리한 공방전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나주 세력이 궁예에게 손을 내민 데는 이해관계가 분명히 있었다. 해상 교류를 통해서 충분히 접촉이 이루어진 상황이었고, 견훤의 무도함을 성토하며 군대 파병을 요청하기에도 명분이 있었다. 궁예 입장에서도 나주 점령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두 가지였다. 견훤의 후방을 공략하여 전선에 대한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후백제의 대외 교역 위축과 외교적 고립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궁예는 즉각 나주 세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궁예는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해군을 거느리고 나주로 내려가 이 지역을 빼앗아 나주로 만들도록 하였다.
나주 정벌에 앞서 왕건은 이미 900년에 경기도와 충청북도 일대를 공격하여 궁예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장군이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896년에 궁예에게 귀부하였고, 궁예는 이후 본거지를 송악으로 삼았다. 이때 송악에서 활동하던 왕륭은 금성태수로 발령받았고, 왕건은 벌어참성을 쌓고 그곳의 성주가 되었다. 나주 정벌 요청을 받은 왕건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남하에 나섰다.
903년 3월, 왕건은 수군을 거느리고 개성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내려왔다. 1년 이상 공격을 준비한 끝에 감행한 기습이었고, 전례 없는 공격에 후백제는 크게 당황하였다. 왕건의 군대는 후백제의 나주에 존재하던 동조 세력을 알고 기습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는 천복(天復) 3년 계해(903) 3월에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지경에 이르러 금성군(錦城郡)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개의 군과 현을 공격하여 쟁취하였으며, 이어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게 한 후 개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백제로서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국토의 후방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주가 어이없이 점령당한 것이다. 나주 세력이 뒤에서 고려에 공작을 한 결과 후백제가 손쓸 틈도 없이 고려군이 나주 지역을 점거한 것이다. 향도(嚮導), 즉 이 지역을 잘 아는 내부자가 이끌지 않는 한 이토록 신속한 작전 수행은 어렵다. 나주 세력의 반기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고려로 인해 삽시간에 후삼국의 정세가 뒤집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패배로 모든 정황이 일변하지는 않았다. 후백제의 대외교역은 꼬이기 시작했지만 전주 임피와 회안, 승평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견훤은 이를 수습하고 반격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서에는 909년, 궁예가 나날이 포학해지는 것을 보고 지방 군무에 뜻을 둔 왕건이 마침 나주 지방 방비 사업을 걱정하여 태조에게 나주로 가서 지킬 것을 명령하고 관등을 높여 한찬(韓粲), 해군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건이 군사들을 무마하고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푸니 사졸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용기를 내어 싸울 것을 생각하였고 적들은 그 기세에 위압되었다는 내용도 덧붙여진다. 이 기사는 표면적으로는 왕건의 덕장(德將) 면모를 부각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궁예 중앙 정계에서 왕건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왕건 스스로도 나주 부임을 택함으로써 중앙 정치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주 지역 내부적으로도 상황은 복잡하였다. 친마진파와 친후백제파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기존의 군사력으로는 이를 모두 제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후백제의 나주 세력에 대한 다독거리기 전략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주 점령 이후 후백제를 향하는 선박들이 전주 임피와 회안이 아니면 승평항으로 우회해 들어가게 되면서 견훤의 경제적 위상이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나주라는 거점 하나가 후백제의 대외 교역 동맥을 조이고 있었던 셈이다. 이 압박은 견훤으로 하여금 반드시 나주를 탈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가중시켰고, 그 절박함은 제1차 덕진포 해전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세 > 후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1차 덕진포 해전의 전개와 전략 분석 (0) | 2026.06.28 |
|---|---|
| 왕건의 사신선 나포와 서남해 도서 장악: 해상 패권의 전환점 (0) | 2026.06.28 |
| 왕건의 서남해 해상권 장악과 후백제 외교 노선 차단 (0) | 2026.06.27 |
| 견훤 세력과 나주 세력의 해양 주도권 쟁탈 및 갈등 (0) | 2026.06.27 |
| 후삼국시대 대당(對唐) 항구의 변천과 해상 전략의 전환 (0) | 202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