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견훤 세력과 나주 세력의 해양 주도권 쟁탈 및 갈등

크리티컬! 2026. 6. 2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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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삼국 시대의 혼란과 지방 호족의 부상

신라 말기의 사회적 모순은 9세기 말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과 함께 폭발적인 변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889년(진성왕 3년) 사벌주(상주)에서 발생한 원종과 애노의 난은 단순한 민중 봉기를 넘어, 신라의 지배 체제가 더 이상 지방 사회를 규율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이러한 지배력의 공백은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구축한 호족 세력의 급성장을 촉발했으며, 이는 한반도 전역이 무장 세력 간의 각축장이 되는 지방 분권화의 극단적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전략적으로 가장 주목받은 지역은 나주(금성)를 포함한 서남해권이었다. 이곳은 당나라 및 오월(吳越)과의 해상 무역로가 교차하는 핵심 거점이었으며, 이 해상권의 향방은 후삼국 통일 대업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였다. 본고는 견훤이라는 새로운 권력 중심의 등장과 그가 마주한 나주 호족 세력 간의 필연적 조우, 그리고 그들의 전략적 균열이 후삼국 전개 과정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2. 견훤 세력의 형성과 서남해권 장악 전략

견훤은 상주 가은현(현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그의 부친 아자개는 농민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장군이 된 인물이다. 특히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는 신라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것으로 서술되는데, 이는 견훤 세력이 초기 세력 확장 과정에서 신라 왕실과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지역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교한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의 초기 해상 활동 중심지는 그간 나주로 오해받아 왔으나, 고증에 따르면 실제 초기 제해권 장악의 핵심지는 순천만(승평) 일대였다. 그는 서남해 방수(防戍) 임무를 수행하는 비장(裨將)으로서 해적 소탕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고, 이 과정에서 순천 지역의 유력 호족인 김총(순천 김씨 시조) 및 박영규 등과 결탁하여 강력한 해상 군사력을 확보했다.

892년 견훤은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당시 신라의 건재함을 고려하여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사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 2천호'라는 긴 관직을 자호(自號)하는 유연한 정치력을 보였다. 이후 900년 전주(완산주)로 천도하며 후백제를 건국한 그는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며 해상권 장악을 통한 국제적 정통성 확보에 주력했다. 견훤의 세력 기반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해상 무역로 보호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득과 당나라 유학 승려 및 상인 세력이라는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의 결합체였다.

 

3. 나주 세력의 독자성과 견훤과의 전략적 균열

나주 지역은 영산강 하구의 회진항(會津港)을 보유한 국제적 거점으로, 9세기 말까지 대당(對唐) 교류의 핵심 항구였다. 초기 견훤 세력이 순천만을 기반으로 해상 주도권을 확장할 때 나주 세력은 일시적으로 협력적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나, 견훤이 후백제 건국 이후 서남해의 군소 해상 세력을 강력하게 통제·규합하려 시도하면서 이해관계의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견훤의 전략은 해상권을 국가 체제 아래 독점적으로 편입시키려는 중앙 집권적 시도였고, 이는 회진항을 통해 독자적인 무역 이득을 향유하던 나주 호족들의 생존 전략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견훤이 순천 세력(김총, 박영규)을 핵심 측근으로 삼아 해상 통제를 강화할수록, 나주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대안적 파트너십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적 균열은 견훤이 서남해 전체를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훗날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4. 나주 세력의 이탈과 왕건(고려)과의 결탁

견훤의 독주에 반발한 나주 세력은 903년경 태조 왕건이 이끄는 수군에 호응하여 귀부(歸附)했다. 이 사건의 학술적 엄밀성은 금석문 자료를 통해 증명된다.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911년경)에 따르면, 이전까지 후백제의 내지(內地)로서 '무주(武州) 회진'으로 불리던 지명이 왕건 점령 이후 '나주(羅州) 회진'으로 변천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나주 지역이 후백제의 통제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나주 세력의 이탈은 후백제에 치명적인 전략적 타격을 입혔다. '선사들의 입국 항구 변천 표'를 분석하면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다.

  • 905년(형미), 908년(경유): 여전히 '무주 회진'을 통해 입국했다.
  • 909년(여엄): 입국처가 '무주 승평(순천)'으로 강제 변경되었다. 이는 고려가 나주 회진항을 차단함에 따라 후백제가 항로를 동쪽으로 이동시켰음을 의미한다.
  • 911년(이엄): '나주 회진'으로 입국했는데, 이는 해당 지역이 이미 고려의 안정적 제해권 아래 있었음을 방증한다.

나주의 상실은 단순히 항구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후백제의 수도 전주의 배후를 위협하는 군사적 비수였으며, 오월(吳越)과의 해상 외교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견훤의 국제적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5. 나주 공방전의 역사적 의의와 함의

나주를 둘러싼 갈등은 후삼국 시대의 전쟁 양상을 영토 획득 중심의 육전에서 해양 주도권 기반의 '복합적 해양 경제 전쟁'으로 격상시켰다. 견훤은 순천 지역을 기반으로 초기 해상권을 장악했으나, 나주 세력이라는 핵심 해상 파트너와의 이해관계 조정에 실패함으로써 전략적 고립을 자초했다.

견훤이 서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독점하지 못한 것은 그의 통일 대업에 있어 메울 수 없는 한계였다. 고려는 나주를 거점으로 후백제의 해상 무역을 압박하고 외교적 활로를 차단함으로써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나주 세력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이탈은 후백제 멸망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했으며,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이 해양 세력을 보다 포용적으로 흡수한 왕건에게 넘어가는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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