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제1차 덕진포 해전의 전개와 전략 분석

크리티컬! 2026. 6. 2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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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지역 해상 공방전의 핵심 무대가 된 덕진포는 오늘날 나주 덕진면 일대에 해당한다. '덕진면'이라는 지명과 대석교창주덕진지비(大石橋倉主德津之碑)의 기록은 이곳이 역사적으로 덕진포였음을 뒷받침한다. 당시 이 일대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강폭을 가진 대형 선박들의 출입항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웃한 석해포, 즉 반남현 포구 또한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던 주요 거점이었다.

 

왕건이 이끈 마진군은 서남해의 도서 지역을 평정한 뒤 나주를 옥죄고 있는 후백제 세력과의 결전에 나섰다. 당시 나주 지역은 육로와 해로 양쪽에서 동시에 후백제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사서에는 견훤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목포(木浦)에서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함선들이 머리와 꼬리를 서로 물고 종횡으로 진형을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견훤의 수군이 단순한 방어 배치가 아니라 마진군을 요격하려는 공세적 태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

 

왕건이 건조한 전함 중 큰 것은 갑판 위에 말을 달릴 수 있을 만큼의 다락을 세우고,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망루까지 갖춘 대형 선박이었다. 길이가 31m에 이르는 이 전함은 1492년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반면 견훤 측 함대는 왕건보다 규모가 작아야 한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를 통해 마진군 전함 전단이 수적·규모 면에서 후백제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견훤은 군대를 나누어 목포와 덕진포 양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는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의도였으나, 반대로 각 거점에 집중할 수 있는 병력이 분산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후백제군은 크게 세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마진군은 영산강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진입하는 형세였다. 전력상 3 1의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후백제군으로서는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포구에도 병력을 잔류시켜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덕진포 전투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본류 쪽을 맡은 군대였고, 조병은 석해포에 포진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건은 견훤이 이끄는 본대 전함에 집중하여 동쪽을 치는 과감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후백제 선단은 일시적으로 당황하였고, 전투의 양상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왕건은 이때 자신의 군세가 후백제군에 열세임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서에는 왕건이 장수들에게 "근심하지 말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대의 의지가 통일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지 수가 많고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독려하며 전군에 급히 공격을 명했고, 그 결과 적의 선진이 조금 물러났다고 전해진다. 장수의 독전이 마진군 전체의 사기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목포와 석해포에 이미 후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만큼 왕건이 이 방면을 완전히 돌파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왕건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즉각 화공을 펼쳐 후백제 전함을 공격하였다. 당시 사용한 화공은 소형 선박에 화선(火船)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진군이 선제 공격으로 후백제 선단 사이의 틈새를 벌려놓은 후, 불길과 연화성이 강한 자재들을 쌓아 만든 화선을 그 틈새로 밀어 넣은 것이다. 마침 바람이 마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불었고, 화선이 후백제 선단에 부딪히면서 불길이 번져나가 큰 피해를 입혔다. 불길이 하늘을 찌르자 겁에 질린 후백제 군사들은 바다로 뛰어들거나 창칼에 베여 죽은 숫자가 500여 명에 달했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황급히 전장을 이탈하였다.

 

해전에서의 화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치명적인 전술의 하나였다. 비잔틴의 '그리스의 불', 중국 적벽대전의 화공과 같은 선례가 있듯이, 덕진포 해전 역시 이 전술이 결정적 역할을 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고려 말의 시인 김종직은 나주에 관한 시에서 덕진포 해전을 "맹덕(曹操)의 천 척 군줄이 마침내 주랑(周瑜)의 한 횃불에 재가 되었어라"라며 적벽대전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해전에서 승리한 왕건은 나주 공방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덕진포 해전 이후에도 곧바로 나주 전역이 마진의 수중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전선은 덕진포 북쪽의 석해포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왕건은 반남현 포구 즉 석해포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견훤은 자미산성에 주둔하고, 왕건은 영암군 신북면의 갈마산에 진을 치고 서로 싸웠다고도 전해진다. 이는 제1차 덕진포 해전이 마무리된 직후에도 나주 공방전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왕건은 덕진포 해전 이후 나주 지역의 친마진 세력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능창(能昌)이라는 인물이 주목을 끈다. 능창은 서남해 도서 지역에 근거를 둔 해적 집단의 수령으로, 덕진포 해전 이전까지는 왕건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덕진포 해전 이후 능창은 점차 왕건을 적대하고 견훤과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능창의 군사적 근거지는 압해도였으며, 주변 도서 지역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건은 능창의 동선을 사전에 파악하여 작은 배 한 척으로 갈초도 나룻가에서 기다렸다가 결국 그를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왕건은 능창을 직접 처형하지 않고 궁예에게 보냈으며, 궁예는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은 후 그를 죽였다. 이는 서남해 도서 지역에서 강력한 위상을 지녔던 능창을 제거함으로써 왕건은 궁예에게 공을 돌리는 동시에 나주 서남해 사람들의 원성을 피할 수 있었다.

 

1차 덕진포 해전의 결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 지역에서의 세력 구도는 크게 흔들렸다. 마진군의 승리로 진도·고이도·압해도·갈초도 등 서남해 도서들이 마진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왔고, 나주의 덕진포와 석해포도 마진에 귀속되었다. 이 해전을 계기로 나주 공방전에서 주도권은 마진으로 넘어갔지만, 그 이후에도 912년까지 나주 일대에서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1차 덕진포 해전은 나주 공방전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으나, 완전한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전쟁의 도화선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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