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와의 위태로운 공존

크리티컬! 2026. 6. 2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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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부활시켜 고구려 계승을 천명하였다. 이는 궁예가 고려 국호를 폐기하고 대동방국의 뜻을 지닌 마진, 그리고 다시 태봉으로 국호를 개칭했던 것과는 180도 다른, 정확히 선을 긋는 행위였다. 옛 백제 지역 출신들을 등용한 결과 정권의 근간을 이루었던 고구려계 호족들을 동요시켰던 궁예의 실정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었다. 그러므로 정권 기반이 취약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계 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입장에 선 왕건으로서는 당분간 고구려적인 색채를 유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왕건은 고구려계 호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옛 백제 영역이었던 웅주와 운주 등 10여 주현에 대한 과감한 포기를 결행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 안이 불투명한 동란의 시기에 국가 간 결호(結好)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역(境域)의 확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삼국분할정립안(三國分割鼎立案)을 선뜻 제의했던 것이다. 주변의 상황이 유리하지 않은 입장에 처한 왕건이 '스스로' 제안한 것이었으므로, 견훤에게 대폭 양보하는 입장이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요컨대 결호 기간 동안 후백제와 고려는 설정한 옛 2국의 영역선 안의 호족 세력들을 흡수하는 작업을 꾸준히 추구해 나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화평 기간을 통해 양국은 예전의 왕국을 명실상부하게 복원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7~8년간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한 선상에서 견훤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자 왕건은 한신일(韓申一)에게 명령하여 감미현(천안시 풍세면)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양국은 긴장 관계가 아닌 평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적인 것일 뿐이었다.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는 당장 군사적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지만 내부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웅주의 경우 왕건이 즉위한 918년에 이미 후백제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후백제와 접경한 웅주(熊州)는 이혼암(伊昕嚴)이 지키고 있었는데, 왕건이 즉위하자 궁예의 측근 무장인 이혼암이 급히 상경하였다. 마군대장군 이혼암이 철원으로 올라간 것은 변란이 생긴 것을 알았기에 궁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종료되어 왕건이 즉위하였기 때문에 이혼암의 입장은 애매하게 되었다. 왕건에게 계속 반기를 들기에는 아직은 동조 세력이 포착되지 않았다. 이혼암이 관망하는 사이에 예상 외로 왕건은 빠르게 철원 지역을 장악하였다. 결국 이혼암은 자신의 저택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도리어 왕건에게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혼암 모반 사건을 계기로 웅주 지역은 통수권의 공백이 생겼다. 고려의 개국과 이혼암의 제거라는 정변으로 인해 웅주 지역의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다. 견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웅주를 점령하였다. 본래 후백제의 영역이었던 웅주를 궁예가 빼앗은 것이었는데, 이제 삼국분할 약정 속에서 왕건은 웅주를 포기했던 것이다.

919년에도 고려와 후백제는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고 조용하게 넘어갔다. 왕건은 919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시전을 설치하고 5부를 나누어 6위를 설치하는 등의 체제 정비에 나섰다. 또한 도성 안에 10개의 절을 창건하는 등 대규모 불사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920년에 접어들어 고려와 후백제는 기존의 우호 관계가 서서히 냉각되어갔다.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를 포함한 강주 지역 때문이었다. 920년 당시 강주에는 강주장군 윤웅(閏雄)이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윤웅은 명목상 신라의 조정을 따랐지만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호족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한 윤웅이 920년에 고려에 귀부하였다. 그 배경은 후백제와 연관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는 고려와의 결호 때문에 웅주에서 북진하지 못하였다. 고려 또한 웅주 지역은 사실상 후백제의 영역으로 넘겼지만, 예산군의 일부 지역을 고려의 영역으로 확정하여 후백제와 국경을 이루었다. 따라서 후백제가 고려와 충돌하지 않고 영역을 넓히려면 동쪽의 신라 지역으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남방의 강주 지역은 견훤이 군침을 흘릴 만한 대상이었다. 더구나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고 맹세한 견훤으로서는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여 신라를 타도한다는 명분도 지녔다. 게다가 강주 지역은 더 이상 신라의 영향력이 미치지도 못하고 있었고, 정치적 부담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결국 후백제의 영향력은 강주 지역으로 쏠리게 되었다. 강주장군 윤웅은 현실적으로 신라의 원조를 기대하기 힘들었고, 자력으로 후백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려밖에는 없었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윤웅은 고려에 귀부하였다.

고려로서는 윤웅과 상주 아자개의 귀부를 통해 지금의 경상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전기를 구축했다. 그러나 강주장군의 고려 귀부는 견훤을 자극하였다. 미구에 고려가 강주 지역에 견고한 거점을 구축하리라고 예측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고려는 기왕에 구축한 서해상의 제해권에다가 남해상의 제해권까지 확보하게 된다. 후백제의 대외적인 교류와 교역은 차단되어 한반도 안으로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위협을 간파한 견훤은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하기 전에 강주의 배후이자 후원 세력인 고려를 회유하고자 했다. 견훤은 920년 9월에 아찬 공달을 왕건에게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의 죽전(竹箭)을 선물하였다. 공작선은 공작의 꼬리털로 만든 부채로, 후백제인들이 공작을 직접 사육했다 하더라도 남방 세계와의 교역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물품이었다. 죽전은 화살의 재료인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 특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가 대나무 산지로 유명하였다. 견훤이 북방의 왕건이 갖지 못한 공작선을 통해서는 영화와 경제력을, 화살의 재료인 대나무가 무성하다는 것을 통해서는 풍족한 무력 기반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 왕국의 영생과 불변의 확고한 왕권에 대한 자신감이 담겨 있는 선물이었다.

견훤은 이처럼 고려와의 관계에 틈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신라에 대한 군사적 작전을 전격적으로 신속하게 단행하였다. 겨울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대량(大良)·구사(仇史) 2군을 공취하고 진례군(進禮郡)에 이르렀다. 신라가 아찬 김율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고, 견훤이 그 소식을 듣자 이끌고 물러갔다. 이때부터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틈이 생겼다. 견훤은 지금의 합천군인 대량 즉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은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신라가 각축전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직후 견훤은 낙동강 하류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강주와 양주를 차단하고 지금의 경상남도 남부까지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신라로서는 점점 조여오는 견훤의 위협을 방관할 수 없었고, 결국 신라 조정은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920년 정월에 신라는 고려와 정식으로 교빙하였다. 신라로서는 정치적 실체이자 국가로서 고려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물론 이는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부득이하고도 궁박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궁예 정권과는 달리 왕건은 신라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이로 인해 신라 지역 호족들의 고려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았다. 921년에는 달고적 171명이 신라를 공격하러 내려가다가 고려군의 저지를 받고 패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는 즉각 사절을 보내어 고려에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앞서 강주 일대로 고려가 지원군을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다시금 북부의 달고적까지 막아주면서 양국은 우호가 깊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후백제에서는 궁창과 명권이 고려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922년과 923년에는 신라 지역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922년과 923년에 크게 5곳의 세력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이 중 3곳이 지금의 경상북도라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고려는 강주로 출병한 이후 신라 지역으로부터 민심을 얻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신라 조정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크게 힘 들이지 않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고려가 경상북도 지역을 잠식해 갔다. 결국 후백제는 이를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후백제는 신라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단행하게 되었으니, 바로 조물성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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