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제2차 조물성 전투와 인질 교환의 내막

크리티컬! 2026. 6. 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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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년에도 주변 세력들의 고려 귀부 행렬은 이어졌다. 925년 9월에 발해의 장군과 왕족들이 고려로 귀부하였다. 고려는 남부 전선은 물론이고 북방의 거란이나 말갈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신라 지역에서의 귀부도 이어졌다. 대조성 장군 능헌이 귀부를 요청하였고, 10월에는 고울부(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장군 능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고울부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았다. 왕도인 경주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표면상 신라와의 관계 유지 때문에 고울부까지 고려가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태도였으나, 실제로는 고울부의 귀부를 받아들이고 능문의 부하들을 통하여 고울부를 제어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백제 또한 방관하지만은 않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몸소 조물성으로 친정을 단행했다는 정보가 왕건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에 대응하여 왕건도 직접 출전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그는 견훤을 이기기 위해 양동작전을 먼저 펼쳤다. 제2차 조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 유검필이 이끄는 군대는 후백제의 연산진(충청북도 청주시 문의면)과 임존군(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하였다. 유검필은 연산진과 임존성을 공격함으로써 후백제군의 방비를 분산시키려 했다. 본군을 나누어 서부전선으로 군대를 보내면 왕건이 동부전선에서 보다 손쉽게 견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왕건에게 있어서 견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에초에 왕건이 양동작전을 구사한 것 자체가 견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25년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견훤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임시로 평화를 유지하는 술책으로써 견훤의 군사를 피곤케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당제(堂弟)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견훤도 그의 외생 진호를 보내 인질을 교환하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의 힘은 기존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왕건은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내려온데다가 여러 가지 상황도 고려에 유리하였으나 수많은 싸움을 거쳐온 후백제 군대의 중심에는 견훤이 있었다. 견훤의 지도력은 후백제에서도 가히 절대적이었다. 후백제의 충성스러운 정예군은 고려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였고, 기록에는 견훤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후백제군이 오히려 고려군을 압도하였음을 뜻한다. 왕건은 급히 유검필에게 전령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견훤과 조물군에서 전투할 때 견훤의 군세가 매우 날카로워서 좀처럼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태조는 적군의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려고 하였는데 유검필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쳤으므로 군대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견훤이 겁이 나서 화친을 청하니 태조가 그것을 허락하고 견훤을 병영으로 불러다가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유검필이 간하기를, "사람의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데 어찌 경솔히 적과 접근하겠습니까?"라고 하니 태조는 그만 두었으며, "그대가 연산과 임존을 격파한 전공이 적지 않으니 국가가 안정될 때를 기다려 응당 그대의 공을 표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검필의 합류로 사기가 좀 더 진작되기는 하였으나, 조물성 주변이 아무리 고려에 협조적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서는 외지에 속했다. 승산이 확실하지 않는 전투는 빨리 종료하는 게 양군에게 이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건은 조물성 전투를 끝내고자 하였다.

화친을 요청한 주체를 놓고 사서마다 기록이 엇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건 측에서 화친을 요청했다고 하는 반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견훤 측에서 화친을 요청한 것으로 적혀 있다. 전반적인 상황을 볼 때 화친을 요청한 이는 왕건으로 생각된다. 이는 왕건이 그때 견훤을 상보(尙父)로 불렀다는 사실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기록에서는 10살 정도의 연령차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상황이었다면 굳이 이러한 예우를 갖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상황이 불리하였고 견훤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그만한 대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양측은 서로의 인질을 맞교환하였다.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를, 왕건은 당제(堂弟) 왕신을 각각 보냈다. 왕신은 당시 원윤이라는 관직에 있었다. 진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러니 왕건 쪽에서 좀 더 성의를 보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조물성 전투에서 화친을 논의할 때 왕건의 진영에서 논의를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유검필은 이를 막았다. 아군의 본진에서 적장을 끌어들인다는 점은 견훤에게 위해를 가함으로써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아군의 위엄을 적에게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을 위축시킬 수도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진영에 견훤을 불러들이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견훤이 회담을 하기 위해 왕건 진영으로 온다면 단신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견훤 또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자신을 호위하는 부대를 이끌고 오는 게 자연스럽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려 군영의 상황을 볼 수 있게 된다. 혹은 날랜 군사들을 다수 데리고 와서 안팎으로 호응하여 조물성의 성문을 여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다. 유검필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기에 견훤의 입성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화친하게 되었다. 견훤 또한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온 상황인데다가 험준한 조물성을 무조건 차지하리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고려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오는 상황에서 그들의 요청을 무조건 배척할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그들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빚을 만들고 대응해 나가는 게 후백제로서는 실리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양측은 925년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을 일으켜서 곧 싸우게 되었는데, 당시 전황을 견훤은 928년에 왕건에게 보낸 국서에서 처음에는 적(敵)을 업신여겨 바로 전진하니 마치 연가시(懸蛆)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더니, 끝내는 어려움을 알고는 급히 물러감이 모기가 산을 진 것과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이 국서는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이긴 후 보낸 것으로, 후백제의 적문(檄文)에 반박하는 내용을 싣고 있어 실제 상황보다 고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글을 전개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를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물성 전투의 결과 신라가 처한 상황도 주목된다. 고려의 군대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던 신라군은 막상 조물성 전투에서 고려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을 보자 안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물성을 비롯한 경상북도 일대가 후백제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경주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신라는 지속적으로 고려에게 견훤과의 싸움을 부추기는 모습을 보였다. 신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견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화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고려는 신라에게 동의한다는 대답을 하였지만, 후백제와의 화친은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후백제 세력은 막강하였고 특히 견훤은 강건한 모습으로 고려군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좀 더 힘을 쌓아 대응해 나가야 할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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