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후삼국

인질의 죽음으로 화친이 깨어지다. 조물성 전투 이후의 격동

크리티컬! 2026. 6. 2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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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과 왕건은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조물성에서 철군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비긴 승부였다. 그렇지만 사실상 견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 조물성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 이전까지의 영역은 고스란히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게다가 당분간 고려가 공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로서도 역부족으로 인하여 후백제의 경상북도 지역 공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견훤은 조물성 전투가 끝난 12월에 곧바로 거창(居昌) 등 20여 성을 일제히 공격하여 합락시켰다. 거창은 경상도 거창으로 대야성에 인접해 있다. 대야성을 확보한 시점에서 거창 등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조물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 거창 등 20여 성을 후백제가 확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그렇지만 조물성 전투 이후 후백제는 경상북도 일대로의 진출을 위해 낙동강유역을 점거하고 거창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후백제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지고 싶었기에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조물성 전투 이후 견훤은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바로 후당에 사신을 보냈다. 후백제는 당시 활발한 외교정책을 펼쳤기에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견훤의 관작을 보면 전주·무주·공주의 존재가 보인다. 이는 완산주·무진주·웅주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후백제가 차지한 주요 영역을 가리킨다. 당시 후백제는 과거 백제 영역의 상당한 지역을 회복했다. 웅진성(공주)이나 사비성(부여) 도읍기의 백제 영역을 거의 회복한 것이나 진배 없었다. 여기서 나아가 후백제는 신라 영역까지 잠식하면서 전성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상황이 급변하였다. 925년 여름 4월,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가 병으로 죽었다. 왕은 이 시랑 의훤을 시켜 그 시신을 보내 주었더니 견훤은 고려가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하여 고려가 보낸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으로 진격하여 왔다. 왕은 여러 성들에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926년 4월, 견훤에게 갑작스런 급보가 전해졌다. 이와 더불어 고려의 시랑 의훤이 그 상(喪)을 호송(護送)하면서 후백제로 왔다. 시랑은 차관급이므로 상당히 예우했음을 뜻한다. 갑작스럽게 죽은 진호의 시신을 후백제에 보냄으로써 고려는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인질의 사망은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명분거리이기도 했다.

진호의 죽음을 둘러싼 책임 문제는 사서마다 기록이 엇갈린다. 『고려사』에는 이 때문에 견훤이 고려의 인질인 왕신을 죽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르게 적혀 있다. 왕신을 곧바로 죽인 게 아니라 일단 옥에 가두었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의심하였고 고려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왕신을 당장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더라도 머지 않아 죽이거나 죽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와 후백제의 우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되었다. 서로의 인질이 죽음으로써 다시금 전쟁이 시작되었다.

왕건이 일부러 진호를 죽였을 가능성도 고려는 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정은 이후의 상황과 잘 연계되지 않는다. 제2차 조물성 전투에서 사실상 패배한 왕건이 굳이 반년 정도 지난 시점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호를 살해한 이는 견훤일 가능성도 있다. 견훤은 병법에 능하였고 다양한 계략으로 후삼국시대의 전쟁을 주도해 나갔다. 진호는 견훤의 직계 혈육도 아닌 생질인데다가 전시에는 적의 희생을 통해 큰 이득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견훤은 화친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병약한 진호를 인질로 보내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사망하게 하였을 수도 있다. 혹은 자객을 보내 죽게 만들고는 책임을 고려에 뒤씌운 다음 선전 포고를 하였을 가능성이다. 실제 후백제군이 웅진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간 사실을 볼 때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혹은 조금 엉뚱하지만 아자개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다. 상주의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이면서 왕건에게 항복한 독특한 전력을 가졌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고 난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애초에 견훤과 불화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진호는 외지에서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기에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는 아자개나 그 가족들과 교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훤에게 불만이 있던 아자개가는 고려와 후백제가 우호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면, 진호를 대신 죽여서 고려와 후백제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게 하는 등 견훤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진호의 사인(死因)은 베일에 싸여 있다. 이를 계기로 견훤은 즉시 군대를 모아 웅진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왕건은 여러 성에 명령을 내려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려군이 몰리는 상황이었다. 답답하였던지 신라의 경애왕이 사신을 왕건에게 보냈다. 경애왕은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대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대왕께서 한 번 전고(戰鼓)를 올리는 위세를 떨치기만 하면 견훤은 반드시 저절로 패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건은 신라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요, 악(惡)이 차서 스스로 쓰러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상투적인 인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왕건은 기실 견훤을 두려워하였고,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써 싸움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후백제에는 절영도의 총마에 대한 도참이 퍼져 있었다.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로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이었는데, 이때 와서 전일 고려에 말을 선사한 것이 후회되어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왕건이 웃으면서 그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도참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도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 도참을 퍼뜨린 대상은 고려로 생각할 수 있다. 918년 3월에 중국 상인 왕창근이 얻은 거울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왕창근은 저자 거리에서 한 노인을 만났고, 그 노인은 사방이 1척 정도 되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은 이를 쌀 2말로 샀다. 이 거울에는 147자의 글씨가 적혀 있었고, 이를 궁예가 해석하게 하니 왕건이 삼국을 통일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다. 절영도의 총마도 이와 비슷하게 고려 측에서 이야기를 꾸며내어 후백제의 백성들에게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백성들이야 양국 간에 어떠한 물자가 오갔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자국에 부정적인 이야기라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었다. 견훤은 이러한 민심을 읽었기 때문에 궁색함을 무릅쓰고 절영도의 총마에 대한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왕건과 견훤은 한번 싸우기 시작한 이상 쉽게 싸움을 멈추기는 힘들었다. 양국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전하여 통일이 될 때까지 끊임 없이 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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