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웅은 강주 지역에서 친고려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후 윤웅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 반면 강주 지역을 왕봉규(王逢規)가 장악해나가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는 왕봉규 세력이 윤웅과 병립하였던지 아니면 윤웅 세력을 장악하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왕봉규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924년과 927년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당시 중국과의 통교는 자주적인 세력임을 선포하는 외교적 행위였다. 그런 만큼 왕봉규는 고려나 후백제는 물론 신라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된 세력이라는 인상을 준다. 더구나 924년 당시 왕봉규의 직함은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927년 3월에는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그해 4월에는 지강주사(知康州事)였다. 이러한 직함을 토대로 왕봉규 세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일단 천주의 위치는 『삼국사기』 지리지 기사를 참고하면, 강양군은 원래 대량야(代良也)로도 쓴다는 주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지금의 합천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삼기현은 원래 삼지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팔계현은 원래 초팔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초계현이다. 의상현은 원래 신이현 또는 천주현이라고도 하는 것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신번현이다. 앞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강양군은 지금의 합천군 일대였다. 강양군에 속한 총 3곳의 현은 삼기현·팔계현·의상현이다. 이 가운데 의상현의 별호가 천주현으로 924년 왕봉규의 직함인 천주절도사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왕봉규는 천주현 즉 의상현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의상현은 지금의 의령군 부림면에 해당한다. 팔계현과는 미타산을 경계로 한 것으로 보인다. 미타산은 두 개 현에 걸쳐 있는 형세이다. 부림면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신반천이 흐르며, 대야성에서 황강을 따라 낙동강으로 들어선 다음, 신반천으로 다시 들어설 수 있다. 즉 대야성의 황강 수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의상현 즉 지금의 부림면에 소재한 성들 중에서 미타산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타산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산성으로 지목하고 있지만, 현재 시굴조사만 한 상황이므로 그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미타산성은 해발 662m의 미타산 주변 8부 능선 상에 축조된 석축성으로 둘레는 약 2㎞이다. 성 안에서는 북쪽으로 초계분지가 굴어보인다. 미타산성 남동쪽은 신반, 동쪽으로는 멀리 창녕, 서쪽으로는 천황산과 국사봉, 남쪽으로는 봉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미타산성의 북쪽으로는 초계분지라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지만 동·서·남쪽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의상현 즉 부림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주변을 관장할 수 있는 지형적 우세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후삼국시대에도 미타산성은 중요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미타산성이 왕봉규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봉규는 미타산성을 치소로 삼고 세력을 확장하였을 것이다. 그 경제적 기반은 초계분지와 부림면 일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쪽은 낙동강 중류에 해당하며, 북쪽에는 황강이, 남쪽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기에 이들을 모두 관장할 수 있는 지리적 우세를 점하고 있다.
왕봉규는 윤웅과는 구분되게 미타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수계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중류의 수계권을 장악하여 중간에서 쥐고 있는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황강 수계권과 남강 수계권 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봉규의 세력 확장으로 924년 이전에 강주 관내의 항구를 점거하였다. 강주 지역 항구로는 덕안포를 꼽을 수 있다. 덕안포는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비문』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정명(貞明) 7년(921) 가을 7월 강주 덕안포에 도달하였다. 곧바로 봉림으로 가서 진경대사에게 귀국을 인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안포의 소재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다. 그렇지만 바다와 접해 있는 남해나 하동, 사천 지역 어디 쯤의 포구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진주의 서편에 소재한 하동의 다사진이 삼국시대 이래로 유서 깊은 항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곳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왕봉규는 덕안포를 장악한 후 중국과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계권의 장악과 외부와의 교역은 왕봉규가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927년에 접어들자 그는 강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렇기에 왕봉규는 당당하게 '권지강주사'와 '지강주사' 관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의 세력 범위는 수계를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이는 앞서 후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할 때 공격한 지역과 일부 겹치는 면이 있다. 또한 왕봉규는 반고려적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도리어 친후백제적인 성격을 지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왕봉규는 강주 지역을 장악하면서 후백제와 우호 관계를 설정하되,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왕봉규와 후백제와의 우호 관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쉽게 증명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절영도의 총마가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924년 8월에 견훤은 왕건에게 절영도의 총마 한 필을 선물했다. 지금의 부산 영도인 절영도는 후백제보다 왕봉규 세력에 좀 더 가까운 곳이다.
왕봉규가 김해 세력과 교역을 하면서 획득한 총마를 견훤에게 바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때 왕봉규의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 즉 의령 일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왕봉규가 남해안을 장악했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다만 견훤은 총마를 통해 자신의 세력이 한반도 끝까지 미친다는 점을 왕건에게 과시하고자 총마를 선물한 것으로 추측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총마를 선물하기 불과 2년 전인 922년 5월에 후백제가 사신 휘암을 쓰시미에 파견한 사실이 그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후백제가 쓰시마에 사신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그 교두보격인 김해 지역의 장악이 선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924년 7월에 부산 앞바다에 소재한 절영도의 총마를 고려에 선물했을 정도로 후백제는 김해와 부산으로 이어지는 연안 지역과 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와 신라의 금주(金州) 즉 김해를 연결하는 신라인 연락권이 파견되어 있었을 정도로 경제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김해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일본 열도와의 교섭을 열망하고 있던 후백제는 920년에 전격적으로 김해 지역의 장악을 서둘렀다고 하겠다.
한편 고려로서는 친고려적인 성향의 윤웅을 대신하여 친백제적인 성향을 띤 왕봉규가 활동하는 점이 불편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또한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왕봉규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왕건은 왕봉규에게 손을 뻗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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