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봉규가 후당에 사신을 보냈던 927년 4월은 왕봉규 세력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바로 이 시점에 고려는 군대를 일으켜 왕봉규 세력의 본거지 쪽으로 진군하였다. 사서에는 여름 4월, 임술(壬戌)에 해군장군(海軍將軍)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어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강주를 치게 하니 전이산(轉伊山)·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돌산(突山) 등 4향을 항복시키고 사람과 물자를 노획하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왕봉규 세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시 고려군의 해상작전은 나주에서 출발한 선단이 공격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이산·노포·평서산·돌산은 왕봉규 세력과 연관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고려군은 이곳을 장악하면서 강주로 진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 4향은 강주로 가는 수로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이산은 전야산군(轉也山郡)을 가리키며,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에 비정된다. 평서산현은 남해군 남면, 그리고 난포현은 남해군 이동면으로 비정된다. 즉 남해 도서의 주요 산성을 고려군이 점령하여 수군 진출로를 확보한 것이다. 그런 후에 고려군은 강주로 진격한 것으로 보인다. 돌산 역시 이러한 남해 도서들 인근에 소재한 곳으로, 지금의 여수시 돌산읍에 해당하는 섬이다. 돌산섬은 앞서 살펴본 남해의 여러 도서 중 맨 서쪽인데다가 길목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고려군의 최초 점령지로 생각된다.
전이산 즉 전야산군의 주요 치소부터 살펴보면, 현재 남해군의 군청 소재지는 남해읍이지만 본래는 고현면이 남해의 중심지였다. 고현면 일대에는 성산토성과 성담을동산성이 소재하였다. 성산토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던 산성이고, 성담을동산성 역시 고려시대의 유적으로 드러났다. 이 밖에 고현산성(古縣山城)으로도 불리는 대국산성(大局山城)은 고현면 북쪽인 설천면 진목리에 소재하였다. 대국산성은 해발 370m 대국산 정상부의 외곽과 동측 사면 7부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중성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지와 연지, 남문지가 확인되었고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산토성과 대국산성은 직선거리로 2.8㎞ 정도 떨어져 있어 두 성은 서로 관련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포는 난포현으로 지금의 남해군 이동면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비자당산성·남해장성·성고개성·곡포보성이 남아 있다. 비자당산성과 남해장성은 고려시대~조선시대에 걸쳐 사용되었고, 성고개성은 삼국시대~조선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성들 가운데 노포에 소재한 성은 비자당산성으로 추정된다. 비자당산성은 비자당 마을 서쪽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 테뫼식 석축성으로, 강주와 내왕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고려군은 이곳을 점령하고 강주 일대로 나아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서산은 평서산현으로 지금의 남해군 남면이다. 남면에는 임진성과 고진성 그리고 평산포진성이 소재하였다. 이 3곳의 성은 모두 조선시대의 유적이라고 전해지지만, 임진성은 평산포를 방어하고 선박들의 왕래를 살피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소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평산포진성과 고진성은 평지성의 형식이며 임진성은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평산이나 평산포라는 지명은 평서산이라는 지명과 일맥상통하므로, 이곳을 평서산현으로 지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돌산 권역에도 여러 산성들이 남아 있다. 방답진성·금성리 토성지·본산성·수죽성·과녁성·월암산성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방답진성은 조선시대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산성은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까지, 그리고 월암산성은 백제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의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와 연관 있는 성은 본산성과 월암산성을 지목할 수 있다. 본산성은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산 881번지 일원으로 해발 271m의 본산(本山) 정상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남해와 접하고 있어서 조망권이 좋다. 이곳은 광양만으로 들어가는 입구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해상 교통로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처럼 전이산은 대국산성, 노포는 비자당산성, 평서산은 임진성 주변, 돌산은 본산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고려군은 전이산·노포·평서산·돌산을 장악하여 왕봉규 세력의 기반이었던 해양 교역을 차단했다. 아울러 고려는 강한 군대를 바탕으로 강주 지역으로 진군했던 것 같다. 이후 왕봉규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왕봉규 세력은 이때 고려에 의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 의해 왕봉규 세력이 잠식당했으리라는 추정은 임언의 사례를 통해 유추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왕봉규의 사신인 임언은 927년 4월에 후당에 조공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서는 임언이 927년에 후당에 조공을 한 기사가 보인다. '이 해(是歲)'라고만 했으므로 임언을 보낸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려의 사신 자격으로 후당에 조공을 한 점은 분명하다. 이후 임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추정할 수 있다.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는 경주인(慶州人)이니 태수(太守) 임언(林彦)의 딸로 효성태자(孝成太子) 임주(琳珠)와 효지태자(孝祗太子)를 낳았다.
이 기사를 통해 임언이 경주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왕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점을 알려준다. 임언은 왕봉규의 신하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지만, 그가 귀국한 뒤 왕봉규 세력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고려가 들어서 있었다. 임언은 어쩔수 없이 고려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는 후당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그 실력이 인정되어 다시금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왕봉규가 아니라 고려의 사신으로 후당에 갔던 것 같다. 이후 임언은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의 중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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