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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전사 건담: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연출노트

크리티컬! 2026. 4. 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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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작품 평가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동전사 건담』 4월호 방영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하나는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시작한 토미노의 이야기에 감동해주었으면 한다는 것. 『기동전사 건담』이라는 픽션이기 때문에, 그 주제성에 반응하는 데 저항감이 생기는 일은 흔히 있다. 그 점은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즐겨 주었으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만 말하자면, 토미노는 이야기의 지향점으로서 인간만큼 자유로운 존재는 없지만, 그 자유로움 때문에 인간은 때로 무서울 만큼 슬픈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코미디 터치의 여러 장면, 특히 아무로와 샤아, 혹은 가르마와 샤아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전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해준다 해도 된다.

이 판단이야말로 결과일 수도 있고, 창작을 해온 내가 실제로는 알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극을 구성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가져다주는 진정한 의미라고도 생각한다.

따라서, “상상은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관점에서 『기동전사 건담』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한다.

분명 당신의 상상력은,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본심에 대하여

건담이 이처럼 기묘한 이야기가 된 것은, 그 쓰임새가 우선 ‘본심’을 이야기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글은 이야기해서는 안 될 본심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권적 지배층의 본심이 제약당하기 시작한 18세기 이후, 소설이 성립했다는 식의 근거를 찾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형태로 사고를 정리할 수 있게 된 덕분에 문학도 대중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담에서는 전부가 이 본심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 구조를 깨닫고 이야기를 창작하는 근본이 없으면, 본래의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너무나 도식적이고 가공된 것일지라도 그 근원은 제대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원인이 있기 때문에 드라마가 성립해 주었다고도 여기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출판된 애니메이션 잡지, 팬클럽의 회보, 그리고 그 안의 ‘메인 리뷰’ 기사 같은 것을 확인해 보면, 대체로 아파심과 같은 인간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체로 나는 애니메이션을 개인으로서, 작품으로서 알기 시작한 사람들이 아직 덜 자란 시기였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건담』도 그때 13세였던 사람들, 즉 전후 민주주의의 아이들처럼 ‘스포일’된, ‘자기중심적인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을 붙잡은 이야기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건담』이 지금도 그런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까지나 그러한 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있다.

이 두 조건은, 다시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본심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가볍게 언급될 수 있는 듯 보이면서, 실은 통하지 않는다. 옳다고 믿는 자아를 계속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20세기 후반쯤에 이르면, 개인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요구 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건담』은 본심이 없으면 안 되는 세계를 표현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세계의 위기를 구한 싸움이라고 하면서도, 그 주역은 한 부대에 불과하고, 반 년 정도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멸망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마음을 타고난 듯한 아이들, 그런 뜻에서 요구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이야기에조차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눈에 띄기 어려우냐고 하면, 로봇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봇이 있음으로써 제약을 받기 때문에, 내용의 질을 낡아지지 않게 가져갈 수 있었다. 즉, 이것이 ‘보통의 본심’이었다면, 이야기로는 정말 재미없어서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건담』이 지금도 애니메이션처럼 읽힐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장치 때문이다.

이 점에서 건담은 정말로 오락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점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자로서 참가했던 몇 사람에게는 작품주의에 빠져버리는 일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의 전개

그러나, 그러니까 오히려 알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인 나 자신도 그것밖에 볼 수 없었을 정도다. 나에게는 43편이 모두 걸려서야 비로소 그것이 보였다.

그래서 거기에는 일부러 ‘멘토’로부터의 끌어올리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이른바 ‘뉴타입’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여기서부터는 샤아와 아무로, 전 세계의 재앙을 발생시키는 일에 몰두하는 권력,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뉴타입이라는 개념 설정은, 확실히 이 체험의 출구로서의 이야기 전개의 실마리를 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중간의 정신적인 불안정성은 평균화되어, 어디까지나 단순하게 마무리되어 갔다. 나는 그 점에 불만을 느끼지 않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알기 쉬워지지 않는다는, 텔레비전의 선량한 시청자 근성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한 가지 이야기가 생긴다.

즉, ‘아무로와 세일라’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이야기가 여전히 건담 이야기의 방향으로 말해진다는 점이었다. 즉, 본심이라는 캐릭터가 있어서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건담이라는 이야기에서 요구되는 것으로서의 캐릭터가 실체를 갖게 된 것이며, 거기서 각각의 이야기가 결정되어 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마이크로 컴퓨터를 조립하고, 프라모델을 만드는 아이들의 사고방식 속에서, 읽는 것이 가능한 것은 자신의 사건뿐이다. 이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새로운 노인을 만들어냈고, 성적 반항이나 노예 연애 같은 것까지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야하기 쉬운 드라마’를 받아들이는 토대가 되었다고 본다.

아무로에게 있어 프라우 보우와의 관계는 오히려 도시적 취향의 문제였으며, 방어 능력으로서의 즐거움, 로컬리즘의 기분 속에 건담의 이야기를 끌어들임으로써, 프라우 보우와 마이 코노가 하나가 되는 일을 꾀했다.

다만, 연출자 쪽에서 보자면, 극의 상태를 한편으로 질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프라우 보우가 파일럿의 로컬리티를 확실하게 정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런 관계를 잡은 것이 제1화에서의 ‘아무로와 세일라’라는 방법의 스타일이며, 이런 식으로 건담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갔다. 작품 콘티상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필름이 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본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러나, 이 점은 솔직히 한 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로봇물이라는 것은,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공허한 형태로 평가하기 때문에, 즐겨 보는 사람들 중에도 그 자체가 무엇인지라는 발상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놀이’가 있었다. 작품의 이미지를 종합해 놓는 것이 어려울 때, 이 요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이런 불문율이 되는 이유였고, 그 결과 형식뿐인 것이 되었겠지만, 오히려 대전의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어른의 모험도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아무로를 강한 존재로 설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은 정말 흔한 설정이며, ‘그래, 이런 것인가’ 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건담』이라는 작품이 여운 있는 끝맺음을 하지 못했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이후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겨야 할 일이며, 실제로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정리해두고 있었다. ‘뉴타입’이라는 테마 속에서 아무로 일행을 움직여 나간다는 것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표리일체의 사고방식이 『건담』을 근본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뉴타입 이야기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인상을 시청자에게 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내가 처음 설정 단계의 구성, 그리고 이야기 전개의 구조를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말로 그것은 감독인 나 자신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제1권에 실린 내가 쓴 「건담 설정서·원안」을 읽은 독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 그 설정서 안에는 뉴타입의 한 단면조차 나오지 않지 않는가.”

실제로 뉴타입 이야기는 제법 의식적인 면에서 보아도 24화쯤에 이르러서야 그 전조가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라라아를 등장시킨 무렵부터 허둥지둥 끌어내어,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허세 섞인 즉흥적 발상이 아니었느냐고 할 수도 있다.

“9화에서 마틸다가 아무로에게 ‘에스퍼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게 해놓고, 결국 잊어버린 것 아니냐?”

이런 의문과 질책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화가 나지는 않는다. 결국 서툰 그림쟁이라고 웃어도 상관없다.

 

뉴타입에 이르는 극작

설정서와 원안 속에서 “남자”로서의 존재가 중요하게 제시된 뒤, 아마도 주인공과 가까운 여성은 주인공에게서 멀리 있는 남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표현 방식 역시 뉴타입을 전제로 하지 않은 표현이므로, 확실히 덧붙인 듯한 뉴타입 이야기라고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설정서를 쓴 것은 1978년 10월에서 12월 사이였고, 설정서를 쓴 시점만 놓고 말한다면 ‘뉴타입’이라는 단어를 아직 만들어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른쪽과 같은 막연한 마지막 장면의 상상을 하고 있었고, 그 순백의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멜로드라마적인 결말로 빠져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건담』이라는 로봇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이 사실적 인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인물을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작품 이미지로 보자면, 그런 순백의 이미지나 감정 표현은 대개 진부한 표현 방식에 머물기 쉽다. 보통의 극중 대사로 처리했다면, 관객은 “아, 그런 식이구나” 하고 넘겨버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었다. 본심인가, 아닌가. 마니아는 표현 방식만 문제 삼으면 안 된다. 표현은 SF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일반 시청자는 마니아가 아니므로, 설정서에 있는 듯한 날것의 캐릭터 감정이 전달된다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한 달쯤 지나면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뉴타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의 기쁨은, 우선 독자와 시청자에게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뉴타입에 대하여

정본이라고 하니 써두겠다. 다른 사람에게는 묻지 말아 달라. 내 밥벌이의 씨앗을 공개하는 것이니까.

현재보다 진화한 인류의 형태는 흔히 “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것은 초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신을 꺼내는 순간, 이야기는 얼마든지 도망칠 길을 갖게 된다.

신은 올마이티, 즉 전능자이므로 무엇을 해도 되는 존재가 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해도 된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아, 이런 도망길도 있었구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감동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빠져나갈 길을 보여준 것으로 끝나버린다. 그렇게 되면 드라마, 즉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사라지고, 썰렁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느끼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념론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다. 예를 들어 “인류는 다시 태어날 것이며, 아무로와 라라아에게서 배우고, 밝은 미래 건설을 위해 매진할 것이다” 같은 내레이션으로 끝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논문이지, 드라마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드라마의 귀결이란, 인간에 의해 드러나는 무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을 시나리오 강좌식 이론에 따른다면, 완전히 정석에 어긋나는 셈이다.

예를 들어 그것이 파트 1의 종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문 같은 방식으로 개념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무로와 세일라의 이야기는 아니다. 더구나 라라아가 이끄는 세계의 이야기라든가, 미래가 광대하게 펼쳐질 것을 예감하게 하는 결말이라고 하더라도, 그때의 대사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바로 그 라스트 신이 성립하게 된다.

라고, 기세로 써보았지만, 거짓말이겠지. 사실은 그 방법밖에 없었고,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그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하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고맙다고 생각한다. 내 밥벌이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 있을 뿐이니까…….

 

구체적 연출론

각론으로 들어가 보자.

‘뉴타입’이라는 말이 발견되었을 때, 이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부분은 아사히 소노라마사의 지시문에 적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우선, 처녀작으로는 증명하기 어려운 글이라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 개념은 좋게 말하면 철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이보그물이나 에스퍼물의 패턴과 다를 바 없어, 조금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능숙하게 설명하더라도 알기 어려운 것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뉴타입’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후보로 떠오른 뒤에는, 이것을 여기서 말하는 아무로의 상태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서, 곧 ‘뉴타입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뉴타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잡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래서 뉴타입을 하나의 개념으로서,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건담』이라는 작품의 전체상이 리얼한 질감으로 그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관념이 앞서기 쉽기 때문이다. 불합리하다는 뜻은 아니다. 관념이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작품 세계를 리얼하게 보이도록 그림으로써, 그 뉴타입이라는 관념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방법론은 어쩌면 모든 작품의 연출론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발단은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모든 장면에서, 그것이 진실하게 보여야 한다는 연출의 터치와, 이야기 구조를 낳게 된다.

 

미라이에 대하여

예를 들어, 2화에서 미라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자.

미라이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녀에 대한 의문이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세웠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화이트 베이스에 도망쳐 들어온 시점에, 눈앞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정도의 일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다.

그녀는 부상병을 돌보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과 구성상의 약속, 낡은 말이지만, 그런 것이 콘티에 있는 듯한 세계가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미라이의 성격은 알 수 있어도 전체상은 알 수 없다. 그래서 파올로 함장의 리액션, 곧 반응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자브로에서 어떤 특수성으로 더 분명해지게 된다.

이로써 미라이의 과거 상황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브라이트의 리액션으로 이어지면, 얼핏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화면의 축적이 사람의 정을 살짝 보여주게 되고, 시청자는 캐릭터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왜 이 손의 발상이며, 구체적인 연출 기법인가.

물론 제2화의 미라이의 행동 원칙으로 말하자면, 이제 충분히 말한 것이다. 브라이트라는 책임감이 강한 선장을 만들어낸 동기는 있지만, 미라이는 그런 사람인가? 병자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는가? 경박한 설명은 나중에 붙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미라이를 내세우면, “그렇군, 의외로 팔방미인이 아니었나?”라는 느낌이 들고, 그녀 역시 앞 페이지의 리액션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아집이 없는 인간성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꽤 구체적으로 성격이라는 인물의 리액션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관객이 “아, 그렇구나” 하고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작품의 장치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장치가 보이기 시작하면, 한편으로는 관객이 식어버릴 수 있으므로, 이 방법은 어딘가 어려운 국면이 있다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해주었으면 한다.

 

다시 뉴타입에 대하여

앞의 ‘뉴타입’이라는 항목으로 돌아가자.

크리스천으로서의 모세가, 실제로 위대한 행동을 한 사람이었는지는 두고 보더라도, 그를 위대한 인물로 보이게 만든 것은 그가 지닌 능력과 일화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무로는 단순히 유능한 캐릭터라는 위치에 세워둘 필요가 있었다.

즉, 뉴타입이라는 인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하자면 ‘아,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할 만한 능력이나 행적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무로에게 없다면, 시청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화면상으로 아무로가 무엇을 했는지는 ‘아, 이것은 굉장한 일이구나’라고 발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의 설정은 명확하게 얻어둔다.

인류 전체 속에서 ‘아무로’라는 이름의 남자와 그 옆에 보이는 ‘라라아’라는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를 겉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면, 그 밖의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처리한 것이, 달리 말하자면 인물, 캐릭터로서 쌓아 올린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형식이다.

나는 상대적으로 샤아, 라라아, 아무로라는 각각의 인간을 이야기 속에서 등장시켰다. 그것에 따라 쿠크루스 도안이라는 이야기로 대표되는 것처럼, 지온의 문제, 람바 랄의 문제를 병행적으로 연결해 나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추리극의 본질이 있다면, 오직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주제를 반복해서 묻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중심부에서는, 결혼이라든가 연애, 권력투쟁이라든가 하는 문제를 반드시 결부시켜두겠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것은 자신이 거기에 있는 듯한 흥분을 독자에게 안겨주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라면, 부하와 지휘관의 관계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인물과 신탁이라는 형태로 이어지는 주술적 관계로 표현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구성하는 것이 올바르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출생에 대하여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하나를 칠 필요가 있어. 몬시뇰.”

이런 발상의 근본에 있는 것은, 독자가 소년병다운 소년에게서 벗어나 있는 듯 느끼면서도, 그런 소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일이다. 그 점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아무로를 훌륭한 사생활인으로 만드는 설정,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어긋남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샤아의 경우에도 같다. 복수라는 형태를 취하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동기는 그가 태어난 배경, 곧 출생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물이 어떤 혈통과 관계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일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드라마의 축을 만드는 작업이 된다.

 

더 나아가, 미라이와 카츠의 만남은 이야기 속에서 상당히 뜻밖의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보면서 몇 년쯤 지난 뒤에야 “혹시…” 하고 떠올릴 만한 부분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미라이가, 아무로를 향해 달려가 “그런 말까지 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 뒤의 흔들리는 엘리베이터의 출발 같은 것이, 이런 방식의 발상이 나타난 장면이다. 다만, 카이 이야기는 별로 교묘하지 않다. 에피소드로 보면 카이의 행동 쪽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조잡해 보인다.

 

샤아와 라라아에 대하여

그리고 여기서 이른바 샤아와 라라아의 관계에 대해서.

그것은 이미 말한 대로다.

샤아와 라라아의 관계는, 이 이야기의 골격에서 보면 핵심적인 장치지만, 둘의 사적인 감정만으로 움직이는 관계는 아니다. 샤아에게 라라아는 자신이 잃어버린 가능성, 혹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어떤 세계를 비추는 존재이며, 라라아에게 샤아는 자신을 발견해준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불안정한 권력관계를 포함한다. 라라아는 샤아를 믿고 있지만, 그 믿음은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놓인 처지와 샤아가 제공한 역할 속에서 생긴 것이다. 샤아 또한 라라아를 아끼지만, 그녀를 자신의 목적 안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라아는, 아무로와 만나면서 비로소 다른 가능성을 본다. 아무로와 라라아의 만남은 연애라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감각을 이해해버리는 사건에 가깝다. 말보다 먼저 상대의 존재가 들어오고, 그래서 둘 사이에는 순식간에 친밀함과 공포가 함께 생긴다.

라라아가 아무로에게 끌리는 것은, 단순히 소년과 소녀의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로에게서 자신과 같은 감각, 그리고 샤아와는 다른 방식의 미래를 본다. 반대로 아무로는 라라아에게서 자신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따라서 이 관계는 삼각관계처럼 보이지만, 보통의 삼각관계와는 다르다. 샤아, 라라아, 아무로 사이에 놓인 것은 질투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해가 왜 오히려 상처가 되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않을까.

그러나 샤아가 아무로에 대해 느끼는 것도, 아무로가 라라아에게 느끼는 것도, 이미 단순한 사랑이나 연애라는 말만으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로와 라라아의 성립은 어째서인가. 기계적으로 이해한다면, 뉴타입의 세계 같은 것은 거짓말이 된다. 뉴타입의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샤아에게 상대가 되었던 라라아와 아무로 사이에 이와 같은 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아무로의 주변에 있었던 이야기로는 라라아의 신비로움이라는 요소를 지탱할 수 없다. 라라아와 아무로의 만남을 보았을 때, 관객이 납득하고 보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무대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에 대하여

동시에, 라라아라는 존재는 관객에게 아주 깊은 선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래서, 그런 성격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녀의 행동은 단순히 동물적인 충동이나 남녀 관계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을 설정의 중심에 두고 바라보면,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 속에도 로맨스라는 것이 어째서 있는가, 혹은 그것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끝나버린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문법 같은 형태에서는 연애를 말하기 위해 한 편의 영화 전체를 써야 한다. 생물학적인 욕구나 질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사유의 결정은 『건담』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라라아의 감수성과 아무로의 감수성, 그리고 샤아의 감수성. 이 세 사람의 감수성은 서로 어긋나 있으면서도 닿아 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해버렸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관계가 된다.

이런 점에서 아무로와 라라아의 관계는, 보통의 연애보다 훨씬 짧고, 훨씬 위험하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상대의 내면을 알아차려버린다. 그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침범당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아무로에게 라라아는 자신이 처음으로 이해받을 수 있다고 느낀 존재이며, 라라아에게 아무로는 샤아와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존재였다.

그때 샤아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라라아를 발견한 사람이지만, 라라아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니었다. 샤아에게 라라아는 자신의 상처와 야망을 동시에 비춰주는 존재였고, 그래서 그는 라라아를 사랑하면서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순이 샤아라는 인물의 비극성을 만든다.

 

오컬트 타입에 대하여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하면,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런 것은 결국 오컬트가 아닌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오컬트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뉴타입이라는 개념은, 신비주의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를 드라마로 밀어붙이기 위한 장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뉴타입은 ‘초능력자’라기보다, 타인의 존재를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를 예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상대의 감정, 불안, 적의, 슬픔이 너무 직접적으로 들어와버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뉴타입은 강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상처받기 쉬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건담』의 드라마를 단순한 전쟁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전쟁은 적과 아군을 나누지만, 뉴타입은 그 경계 너머에 있는 인간의 감각을 드러낸다. 적을 죽여야 하는 순간에, 그 적의 마음을 알아버리는 일. 이것이야말로 아무로와 라라아의 비극을 성립시키는 핵심이다.

따라서 뉴타입은 이야기를 쉽게 만들기 위한 편리한 설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장치다. 적을 적으로만 볼 수 없게 하고, 사랑을 사랑으로만 말할 수 없게 하며, 전쟁을 승리와 패배만으로 정리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오컬트처럼 보이는 요소가 있더라도, 그것은 도망갈 길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한층 더 빠져나갈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기 위한 장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잠재력이 있는지, 혹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고 오로지 노력하기만 하면 그 능력이 거대하게 발휘될 수 있다고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현재의 우리들, 감히 말하자면 ‘올드타입’ 가운데 몇 명이나 있을까?

당신은 믿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힘을?

사립대학밖에 응시할 수 없다든가, “나는 국립대를 노릴 수 있다”든가 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사고와 정신이 끓어오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아마 자신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런 수준에서 모든 것이 나뉘고 정해지며, 그것이 좋다고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나 자신도 사류 사립대학 출신이다.

웃어도 좋다. 그러나 그런 내가 뉴타입으로 향하는 길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한 것은 왜였을까?

결코 내가 영리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소망이었다. 그 소망을 꺼내지 않으면, 이야기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호소하는 힘이 없으면 안 된다고, 희미하게나마 판단했던 것이다.

그 판단과, 어떤 부분에서의 집착이, 인간, 곧 우리 올드타입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관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인간이란 분명 멋진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뉴타입이라는 말을 떠올린 것이다.

 

◆ 뉴타입이란 무엇인가?

자, 그렇다.

내가 이상으로 삼는 인류의 뉴타입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본 것이다.

앞에서 말한 아 바오아 쿠 첫 전투에 대한 지적은 너무나도 타당하지만, 나 자신도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어서 특별히 적어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들 사이의 사고가 서로 직접 연결되는 수단이 발견된다면,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된다는 단순한 문제가 있다. 이것이 진화했다느니 어떠니 하는 말은 우리 세대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 효과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드타입 개인의 사고, 다시 말해 뉴타입으로 향하는 뿌리에서 감정도 열 배, 상상력과 통찰력도 확대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그것이 바로 아무로와 라라아의 대화다.

하지만 여기까지 아무로의 상상력을 확대시켜놓고도, 그것이 상상력일 뿐 믿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작가의 입장이 있다. 그래서 고아처럼 보이는 청년의 선량함, 그 어긋난 모습을 기억하고 이해해주었으면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로와 라라아의 대화가 발생하도록 설정해도, 그것은 뉴타입에 이르는 복선이 된다.

말하자면 인생의 전체상을 조금이라도 알 기회가 없다면, 예를 들어 아무로라는 뉴타입의 소양을 지닌 소년이 있다 해도,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통찰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예로, 전형적으로 인생을 그려낼 수 있을까 하고 상상해보았지만, 우선 무리라고 느꼈다.

당연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형태는 절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의 일생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생을 그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자와 여자의 대표적인 유형, 한 쌍의 부부를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이 하나의 인간관계는 인간 세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전쟁극 속에서는, 젊은이들이 “적어도 이것만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몰리게 되는 운명의 구조를 만들기 쉬운 법이다. 『기동전사 건담』의 세계는, 전쟁 그 자체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무엇을 잃는가를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다. 젊은이들이 싸우는 것은 대의명분을 정확히 이해해서가 아니라, 눈앞의 상황에 밀려 들어간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전쟁을 감당할 인간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기계에 올라타고, 그 뒤에 자신이 한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그려져야 했다.

그런 점에서 전쟁극은, 인간을 빠르게 어른으로 만들어버리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그 어른 됨은 성숙이라기보다 상처에 가깝다. 아무로가 전투를 거듭하면서 능숙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행복이나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능숙해질수록,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된다.

라라아의 존재가 여기에 놓인다. 라라아는 단순히 아무로의 앞에 나타난 신비로운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로가 자기 안에서 아직 말로 정리하지 못했던 감각을 외부의 인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무로와 라라아의 만남은 전쟁 속의 우연한 조우이면서도, 이야기 전체의 중심을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하지만 라라아가 단지 아무로를 위한 존재로만 기능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게도 샤아와의 관계, 전쟁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흔들림이 있다. 이 세 요소가 겹치기 때문에 라라아는 단순한 비극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건담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가장 위험한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 된다.

샤아와 라라아의 관계 역시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샤아는 라라아를 발견했고, 그녀에게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보호인 동시에 이용이기도 하다. 라라아는 샤아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 속에 갇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로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이후 제12화 부근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샤아와 아무로의 차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샤아는 이미 자신을 어떤 역할 속에 밀어 넣은 사람이다. 그는 복수자이고, 지휘관이며, 자신의 혈통과 과거를 등에 진 인간이다. 반면 아무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라아는 아무로에게서 위험하면서도 열린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191화의 아무로와 하몬, 혹은 라라아와 샤아 사이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야기는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애로 좁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그리고 그 인식이 어디까지 상대를 구원하거나 파괴하는가라는 문제다.

예를 들어 아무로가 라라아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 것은, 단지 사랑하는 여성을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존재를 잃는다. 동시에 그 존재를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감각까지 떠안는다. 그래서 라라아의 죽음은 아무로에게 전투의 승리나 패배로 정리될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이 장면은 극의 연출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슬픔을 과장해서 보여주기보다, 순간적으로 이해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야 한다. 아무로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라라아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감각은 아무로 안에 남는다. 이 모순이 이후의 아무로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연출은 눈물의 장면으로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이 부족해야 한다. 이해가 너무 빨리 와버렸기 때문에, 말은 뒤늦게 따라온다. 뉴타입의 대화가 말 이전의 감각이라면, 라라아의 죽음 역시 말 이전의 상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전쟁극, 연애극, 성장극이 하나로 겹쳐진다. 『건담』의 중요한 점은 이 세 가지가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은 인물을 성장시키지만, 그 성장은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지만, 그 이해는 전쟁 속에서 더 큰 고통이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이 다시 인물을 앞으로 움직이게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무로와 라라아, 샤아의 관계는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과,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비극을 동시에 품은 관계다. 이 점이야말로 뉴타입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초능력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중심으로 만드는 이유다.

 

◆ 어느 팬에게서 온 편지

아무로는 『건담』의 범위 안에서 어떻게 파악되었는가. 나는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서는 아무로라는 인물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이라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건담』의 감각을 이해해주면, “아, 그런 것인가” 하고 알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어느 팬레터를 받았다. 그 편지를 읽고, 나는 상당히 놀랐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것은, 이야기의 애니메이션이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말이다.

본래, 애니메이션은, 우리들의 세계관을 무의식적으로 거꾸로 비추어주는 것이어야 하고, 살아 있는 인간이 보는 것과, 캐릭터에서 시작하는 인간의 운동, 그리고 인간의 감각은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글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꽤 놀라면서 읽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연출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듯한 것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보이려 했는가”라는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출은 감각이다.

※ 여기서부터는 필름 촬영에 의한 연출이라는 입장이 된다. 여러 요소를 과감하게 끊어내고, 작품에 도전해야 한다. 건담 제작을 맡게 된 어떤 스태프의 이야기에서는, 세 장의 필름 위에 안정 컷을 올려두는 것조차 걱정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각 스태프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

아무로의 인간적인 세계를 그려놓는 데에는, 일상적인 동작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콘티 단계에서 그것을 어떻게 보이느냐가 문제가 된다.

그때 “더 더럽게”, “더 생활감 있게”라고 지시해도, 그것만으로는 작품이 성립하지 않는다. 콘티에는 단순한 장면 설명이 아니라, 인물이 어떤 감각으로 그곳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전에도 썼듯이, 처음 『건담』을 만들 때는, 그런 점이 완전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콘티 작업이 진행되면서, 한 컷 한 컷의 의미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출가가 이론으로만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화면을 통해 “이 인물은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 연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콘티는 카메라 위치와 인물의 움직임을 정하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화면에 맡기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렵다. 콘티를 그릴 때, “이 컷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설명하기 전에 이미 감각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있다.

그 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감각만으로 밀고 가면, 자칫하면 화면이 자기만족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물의 행동이 그 장면 안에서 얼마나 필연적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인물이 왜 들어왔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들어온 뒤 누구와 눈을 마주쳤는가에 따라 장면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작은 움직임이 쌓여야만, 캐릭터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아무로라는 캐릭터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이기 전에, 그는 먼저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한 인간이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반부의 뉴타입적인 감각도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먼저 인간으로 보이고, 그다음에 새로운 감각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순서가 필요하다.

따라서 연출이란, 눈에 띄는 장면만을 멋지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장면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붙잡는 일이다. 그것이 쌓이면, 나중에 큰 장면이 왔을 때 관객은 그 인물의 감정에 따라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화면 안에서 인물이 움직이고, 멈추고, 말하고, 침묵하는 이유를 하나하나 붙잡는 것이다. 그것이 건담이라는 작품의 화면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틀렸는가를 완전히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의심을 계속 가진 채 만들었기 때문에, 『건담』의 애니메이션 제작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 미술·메카에 대하여

작품의 미술과 메카를 어떻게 둘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멋진 배경을 그린다거나, 그럴듯한 기계를 디자인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미술과 메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가 중요하다.

건담의 경우, 메카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로가 세계와 접촉하는 장치이며, 동시에 아무로를 세계로부터 떼어놓는 장치이기도 하다. 모빌슈트 안에 들어간 인간은 보호받지만, 동시에 고립된다. 이 이중성이 화면에 나타나야 했다.

그래서 메카의 디자인은 너무 장난감처럼 보여도 안 되고, 그렇다고 완전히 현실적인 병기처럼만 보여도 안 된다.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이면서도, 그 안에 전쟁의 차가움과 기계의 무게가 있어야 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우주선 내부나 콜로니의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여야 했다. 그곳에 생활감이 없으면, 아무로 일행은 전쟁 속에 던져진 인간이 아니라, 단지 로봇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로만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미술과 메카는 이야기의 바깥 장식이 아니라, 드라마의 일부다. 어디에 통로가 있고, 어디에 빛이 들어오며, 어떤 벽 앞에서 인물이 말하는가. 이런 것들이 모두 장면의 감각을 만든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면을 보는 사람은, 그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느낀다. 이 세계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단순한 배경인가. 그 차이는 결국 작품 전체의 설득력으로 돌아온다.

『건담』에서 메카와 미술은, 인물의 감정을 감싸고 동시에 압박하는 세계로 기능해야 했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대사를 써도 장면은 떠버린다. 반대로 그 세계가 제대로 만들어지면, 짧은 침묵이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인물의 감정이 전달된다.

그런 점을 보면, 나는 주역을 끌어내지 못한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되새겨보면, 여전히 감동이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청춘’일까.

그렇게 말해버리면 도망치는 꼴이 된다. 작품의 세계 안에서 리얼함을 생각하려면, 어느 정도 도식적인 것과 맞서는 수밖에 없다.

실망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것이 본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또 하나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연출자라는 보통의 작업 안에서, 그때마다 도망치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건 나 자신의 경우이기도 하다. 내가 도망치는 것이 싫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는 인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담 속의 사람들도, 결국은 하나하나의 상황 속에서 도망치고, 버티고, 잘못 판단하고, 또 다음 장면으로 밀려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작품을 만든다는 일의 어려움이다. 어떤 화면 하나가 작품 전체를 결정해버리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아무리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해도 작품의 흐름 속에서는 묻혀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작품을 마무리한 뒤의 허무감 같은 것이 있다. “이 정도밖에 하지 못했나”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때의 나는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변명이라고 한다면, 변명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만드는 인간은, 결국 그런 변명과 자기혐오 사이를 오가면서 다음 일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한 일의 불충분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나는 반성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그런 식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는가. 왜 더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했는가. 왜 어떤 인물은 살아났고, 어떤 인물은 충분히 살리지 못했는가.

그런 반성을 하지 않으면, 다음 작품으로 갈 수 없다.

 

◆ 작화의 원칙

그러나,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건담』이라는 작품에서도 작화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거대한 모빌슈트가 움직일 때, 그것이 가벼워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현실적인 기계처럼만 움직이면, 이번에는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쾌감이 사라진다.

이런 균형은 어렵다. 기계가 기계답게 보이면서도, 캐릭터처럼 감정의 흐름을 받아야 한다. 건담, 자쿠, 샤아 전용 자쿠, 화이트 베이스, 가우, 무사이, 마젤라 어택, 건캐논, 건탱크, 도다이, 빅잠, 엘메스, 지옹 등, 등장하는 여러 메카닉은 각각 다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같은 장난감처럼 보이고 만다.

더구나 극장판처럼 짧은 편집 속에서는, 한 장면의 움직임이 작품 전체의 인상을 좌우한다.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려면, 기계의 무게, 속도, 거리감, 화면 안에서의 위치가 모두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뉴타입의 감각을 말할 때는, 오히려 기계의 리얼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감각이 기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화는 기계의 표면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인간의 감각까지 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충분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방향을 향해 가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작화가들은, 때로는 연출자가 말로 설명하지 못한 것을 화면 안에서 잡아냈다. 반대로 연출자가 생각한 것과 달리, 그림이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애니메이션 제작의 무서운 점이자 재미있는 점이다.

작품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손을 거치는 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생명이 생긴다.

그리고 그 생명이 때로는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강하게 관객에게 닿는다.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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