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고려

고려 전시과체제의 성립과 토지지배 구조의 변질 및 모순

크리티컬! 2026. 5. 22. 21:04
반응형

1. 고려 사회의 근간으로서의 토지제도와 전시과

고려 왕조의 통치 체제를 지탱한 물적 기반의 핵심은 국가적 토지 지배 질서에 있었습니다. 토지제도는 단순한 국가 재정 확보 수단을 넘어, 관료 기구의 위계 질서를 유지하고 지배층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는 전략적 장치였습니다. 그 중심에 위치한 '전시과(田柴科) 체제'는 관직(官職)과 신분적 특권을 매개로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함으로써, 공적 질서 확립과 신분제 유지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경제적 토대였습니다.

그러나 본고에서 다룰 전시과 체제의 붕괴는 단순한 제도의 노후화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는 비대권력층의 등장과 이들에 의한 토지 겸병 및 농장(農莊) 확대라는 구조적 변질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토지 지배 질서의 형해화(形解化)는 결국 국가 가용 자원의 고갈과 농민의 몰락을 초래하며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제 붕괴의 서막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건국 직후의 과도기적 보상 체계였던 역분전부터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고려 건국 직후의 상태와 역분전(役分田)의 설치 배경

태조 왕건의 통일 직후, 고려는 파편화된 호족 세력을 포섭하고 삼국 통일 전쟁에 기여한 공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논공행상을 수행해야 하는 정치적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 시기에 시행된 '역분전(役分田)'은 국가 기구의 미비함과 중앙 집권화의 초기 단계라는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 독특한 토지 분급 제도였습니다.

역분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관직의 고하가 아닌 인물의 '성행(性行)'과 '공헌도'를 지급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아직 정교한 관료제적 위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층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주관적이고 논공행상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제도적 정밀함은 부족했으나, 역분전 체제는 개인의 공훈을 국가의 공적 보상 체계 내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향후 관직 중심의 전시과 체제로 이행하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러한 과도기적 조처는 이후 관료 기구의 정비와 함께 법제적 완성형인 전시과 제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3. 전시과의 제정과 토지지배의 다각적 유형 분석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로 이행함에 따라 고려는 토지 지배권을 체계화한 전시과를 제정하였습니다. 관리들에게 농경지인 전지(田地)와 땔감 채취지인 시지(柴地)를 등급에 따라 분급한 이 제도는 관료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동시에 국가의 공적 지배력을 현시하는 법제적 장치였습니다.

고려의 토지 지배 구조를 분석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수조권(收租權)'입니다. 당시 토지는 소유권의 향배와 수조권의 행사 주체에 따라 민전(民田), 공전(公田), 사전(私田)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백성의 사적 소유가 인정된 '민전'에 대해 국가는 수조권을 행사하여 이를 '공전'으로 관리했으나, 관리나 기관에 수조권을 위임한 경우 '사전'으로 기능했습니다. 전시과 체제는 국가가 토지 소유권 자체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전 등에서 발생하는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공적 권한인 수조권을 관료들에게 분급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전시과는 시정(始定), 개정(改정), 경정(更定)을 거치며 점차 현직 관리 중심으로 지급 범위가 축소되고 액수가 조정되었습니다. 이는 관료 수의 증가에 따른 가용 토지의 부족이라는 현실적 압박을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적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운용 과정에서는 지배층의 사유화 욕구와 충돌하며 내재적 모순을 잉태하게 됩니다.

4. 전시과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구조적 문제와 붕괴의 전조

전시과 체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조권 질서의 형해화와 토지 부족 문제라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특히 공음전(公蔭田)과 같이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 지급된 세습적 토지와 하급 관리 및 군인 등에게 지급된 외역전(外役田) 등의 세습은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가용 토지를 급격히 잠식했습니다. 이는 신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고갈되는 현상으로 이어져 전시과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기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원 간섭기 이후 권문세족의 등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이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같은 국가 핵심 기구를 장악하여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수조권을 탈취하거나 민전을 강탈하는 '토지 겸병'을 자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적 질서인 '수조권'은 사실상의 '사유권'으로 변질되었으며, 이는 거대 농장(農莊)의 형성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경제적 변동은 경작 농민의 신분적 전락이었습니다. 전시과 체제하에서 국가에 세금을 내던 '공민(公民)'이었던 농민들은, 권문세족의 농장에 편입되면서 가혹한 수탈을 당하는 '사민(私民)' 혹은 외거노비와 같은 예속적 존재로 변모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민화(私民化)' 현상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초래했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들의 증가는 고려 사회의 기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1271년(원종 12) 개경 환도 직후 무너진 전시과를 보완하기 위해 '녹과전(祿科田)'을 설치하는 등 고육지책이 시행되기도 했으나, 이는 이미 붕괴한 수조권 질서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인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5. 전시과체제의 유산과 고려 사회의 역사적 변곡점

전시과 체제의 성립과 몰락은 고려 왕조의 운명과 궤를 같이했습니다. 공적 수조권 질서가 권문세족에 의한 사적 소유 질서로 대체된 현상은 고려라는 중세 국가가 체제 유지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했습니다. 1271년의 녹과전 시행은 전시과의 완전한 기능 정지를 보여주는 경제적 표현이었으며, 이는 결국 기존의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토지 지배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역사의 필연성을 낳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 후기의 토지 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실패를 넘어, 왕조 교체의 실질적인 동력이자 물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권문세족의 토지 독점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신진사대부는 전시과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이라는 신왕조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논거가 되었습니다.

 

핵심 시사점

  • 수조권의 사유화와 체제 붕괴: 전시과 체제의 본질인 공적 수조권이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를 통해 사실상 사적 소유권으로 변질되면서 국가의 토지 지배력은 형해화되었다.
  • 생산층의 지위 변동과 재정 파탄: 국가의 직접적 통제하에 있던 '공민(公民)'이 권문세족의 '사민(私民)'으로 전락함에 따라 국가 재정 기반이 붕괴하고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다.
  • 왕조 교체의 물질적 필연성: 1271년 녹과전 설치 등의 임시방편으로는 해결 불가능했던 토지 지배 질서의 모순이 결국 과전법이라는 대대적인 개혁을 잉태하며 조선 건국의 경제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반응형